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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Nov 28. 2020

라캉의 응시 개념과 스크린 이론

할 포스터의 <실재의 귀환>에서  해석되는 라캉

할 포스터는 라캉주의적인 외상적 실재의 이론을 중심으로 미술작품을 독해하는 비평가로서 그의 정신분석학적 예술작품 독해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은 실재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인용하는 사상들의 난해함과 더불어 지식의 방대함을 견뎌내고 제대로 텍스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책 안에서도 가장 중심적 태제에 해당할 수 있는 실재의 귀환을 소개하고 거기서 언급된 라캉의 응시 이론에 대한 해석과 그를 통한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에서 외상적 반복이라는 요소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단 이 책의 전반부는 60년대에 미니멀리즘 운동과 그 예술가들을 설명하는데 집중한다. 그는 미니멀리즘 담론을 주도했던 세 가지 텍스트, 저드의 특수한 대상(1965), 모리스의 조각에 관한 노트 (1966), 프리드의 미술과 사물 성 (1967)을 인용하면서 미니멀리즘이 흔히 생각되는 것만큼 비인간중심적이고 비담론적이라는 오해를 논파하고자 하며 오히려 미니멀리즘을 포스트모더니즘을 촉발시키고 이전 미술작품들의 방대함과 산발성을 사후적으로 '모더니즘'이라는 하나 된 이름 아래 포섭시킨 중심적인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또 다른 포스트 모더니즘의 거대한 담론인 팝아트, 혹은 극사실주의를 제시하는데, 그들은 미니멀리스트들과 같은 문제 제기로부터 출발했지만 그 접근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차이가 일어나는 지점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라캉의 '반복'과 '복귀'의 차이를 언급한다. 말하자면 미니멀리스트들은 그들의 외상적 실재의 귀환을 드러내는 복귀의 요소로서, 단일하고 장소 특정적(in situ)인 사물들을 구현했다면 팝아트 예술가들의 경우 그런 외상적 귀환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강박적 반복을 통해서 초자아적 억압을 통해 작품을 구현하지만 그러한 병적인 반복이 오히려 실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중적이고 중첩된 상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토마톤과 투셰의 구분을 인용하며 서술된다. 오토마톤, 즉 자동장치는 억압된 것을 징후나 기표로서 반복하는 하는 것으로서 '기호들의 집요함'이며 투셰는 실재의 외상적 만남의 복귀로서 쾌락의 원리 너머에 존재한다)


라캉에게서 응시는 주체 내에서 구현되지 않으며, 최소한 첫 번째 사례에서는 그러하다. 어느 정도는 사르트르와 유사하게 라캉은 봄과 응시를 구분하며, 또 어느 정도는 메를로-퐁티와 유사하게, 이러한 응시를 세계 내에 위치시킨다. (라캉은 존재와 무의 사르트르와 시각의 현상학의 메를로 퐁티에 기대고 있다.) 


사실 우리말에서 봄과 응시라는 두 단어는 의미적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단지 잠깐 보는 것과 오래 보는 것, 시선의 강도에 따라 봄과 응시라는 두 가지의 양태로 나뉘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봄과 응시는 강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한다. 프랑스어와 영어에서는 봄과 응시의 단어의 의미적 구분이 뚜렷하며 또한 병행될 수도 없다. 영어에서는 see와 watch, 불어에서는 voir와 regarder의 차이가 그것이다.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see와 voir는 나의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시선이 대상에 닿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watch와 regarder는 내가 1. 일차적으로 감각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2. 이차적으로 그것을 내면에서 의식하거나 반성하는 활동까지를 포함한다.


또한 프랑스어에서 regarder는 응시하다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관계가 있다'라는 뜻으로서 일상적으로는 'Ca ne me regarde pas(그건 나와 관련 없다).'라는 표현에 자주 쓰인다. 직역하면 '그것은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문장이지만 이를 통해서 regard라는 시선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어에서 단지 주체 중심적인 감각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가리킴으로서 이미 사르트르가 말하는 타자 혹은 라캉의 대상 a를 전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어 문법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주체, 객체의 난잡한 뒤바뀜은 한편으로는 프랑스적 사유의 난해함을 유발하고 동시에 주체 중심적 사고의 탈피를 이룩하지 않았나 싶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regard의 이중적 의미를 통해서 라캉 사유에 등장하는 응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르트르의 '시선과 타자'에서 등장한 시선이 사실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응시'인 regard에 해당한다. (이런 단어의 모호한 번역이 혼란을 야기한다.) 여기서 시선이란 주체로부터 대상으로 뻗어나가는 '봄'과 다르게 대상으로부터 주체가 감시당하는 것으로서, 응시한다는 것은 곧 응시당하는 것, 보아지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응시는 주체를 사물과 같이 즉자화 시키고 시간으로부터 공간으로의 지표적 이동을 야기한다는 의미에서 '무시무시한 것' 또는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라캉에게서는 언어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응시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응시는 주체에 앞서 존재하며 주체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보이는” 존재로, “세계의 스펙터클”속에 있는 하나의 “얼룩”일 따름이다. 주체의 위치가 이렇게 설정되므로, 주체는 응시를 어떤 위협으로, 마치 응시가 그나 그녀를 심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위협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라캉에 따르면, “오브제 a로서의 응시는 거세 현상에서 표현되는 중심의 결여를 상징할 것이다.”


우리가 대상이나 예술작품을 보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태도를 전제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대상으로부터의 응시의 위협을 전제하고 그 이후에 감상이 이루어진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작품을 해석하거나 단순히 바라봄에 있어서도 하나의 자유로운 주체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스펙터클이라고 하는 고정관념과 상징적 체계의 갇힌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에 따라서 응시란 언어적 체계로부터 벗어난 순수하게 감각적 행위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라캉은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보다 더, 재현에서 군림해온 주체의 오랜 지배 (데카르트적 주체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재현의 이 측면, 즉 나에게 속한다고 하는, 그래서 소유를 상기시키는 측면”이다. 에 도전할 뿐 아니라, 시선 및 자기의식에서 주체가 누려온 오랜 특권 (나는 나 자신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는 것. 이는 현상학적 주체의 근거를 이룬다)에도 마찬가지로 도전하는 것이다. 햇빛을 받으며 바다 위를 떠 나니는 그 정어리 통조림 깡통은 고깃배에 타고 있는 젊은 라깡을 “빛의 점”의 수준에서, 즉 나를 바라보는 모든 것이 위치해 있는 그 점에서”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라캉이 젊은 시절 어부의 배를 타고 가다 정어리 통조림의 금속표면이 태양빛에 반짝이는 순간 그러한 조망점의 위치가 자기로부터 정어리 통조림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일화와 이를 통해 응시 경험과 상징계의 붕괴를 통해 시각적 경험과 세계의 조망이라는 관념적 경험의 동일시라는 주체의 차원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를 말한다. 이런 시각적 장에서의 지배력 상실과 응시의 체험은 라깡이 자신의 위치가 우스꽝 스러운 그림 속에 있었음을 자각하게 한다.  - 아트 앤 스터디 눈 이야기들 (유충현) - 


그리하여 그(녀)가 볼 때 보여지고 그(녀)가 그릴 때 그려지는 라캉적인 주체는 이중적인 위치에 고정되는데, 이에 따라 라캉은 시각에 관한 통상의 원추, 즉 주체로부터 퍼져나가는 원추 위에다가 또 다른 원추, 즉 빛의 점에 위치한 대상으로부터 퍼져나오는 원추를 겹쳐놓게 되며, 이를 라캉은 응시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각에 관한 통상의 원추란 르네상스 시대의 논문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시피, 주체에게 대상의 지배자라는 위상을 부여하고, 대상들은 주체를 위한 이미지로 배열되고 초점이 맞춰지게 하는 시선의 원추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시선의 감각적 기능에 대한 정의와 가깝다.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이거나, 그 자체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대상들은 주체의 시선에 의해 파악된다. 라캉은 여기서 반대의 방향을 가진 두 번째 원추를 겹쳐놓게 된다. 


나는 단순히 그러한 점의 형태, 즉 거기에서부터 원근법이 파악되는 기하학적 점에 위치해있는 점의 형태가 아니다. 내 눈 속 깊은 곳에선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확실히 그림은 내 눈 속에 있다. 그러나 나, 나는 그림 속에 있다.

말하자면 주체 역시 대상의 주시하에 있으며, 대상의 빛에 의해 사진 찍히고, 대상의 응시에 의해 그림이 된다. 따라서 두 원추는 겹치는데, 이때 대상은 또한 빛의 점(응시)에 위치하고, 주체는 또한 그림의 점에 위치하며, 이미지는 또한 스크린과 한 줄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스크린의 의미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할 포스터는 스크린을 우리를 위협하는 응시를 길들이는 기능으로서의 스크린을 설명한다. 이 스크린을 미술의 관례, 재현의 도식 체계, 시각문화의 약호들이라고 할 때, 스크린은 주체를 위해 대상-응시를 매개하지만, 그러나 또한 그것은 이러한 대상-응시로부터 주체를 보호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스크린은 "맥박 치며 반짝이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응시를 포획하여, 그런 응시를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길들이는 것이다. 라캉의 입장에서 동물들은 세계의 응시에 사로잡혀 있다. 또 그러한 응시 속에서 동물들은 그저 전시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상상적 포획'으로 그처럼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응시를 조작하고 완화하는 것으로서의 스크린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이 응시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의 예시에서 보여주듯 응시란 단순히 시각적으로 바라보아진다는 행위의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주체의 존재와 연관되어있다. 라캉은 응시를 해가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난폭한 것으로, 나아가 우리를 포박하고 죽일 수도 있는 어떤 힘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악마를 쫒는 것과 같이, 사전에 응시의 이러한 포박을 진정시키며 응시의 손아귀에서 보는 자를 '풀어준다.' 라캉에 따르면 이런 것이 미적 관조다. 모든 미술은 길들여진 주시, 즉 응시의 길들임을 열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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