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봄, 김웅현 개인전 관람기
신생 공간이라는 말도 대안공간만큼이나 낡고 오래된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요즘 들어서 이상하게 공허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의 한 지점에서 멀어진 과거를 다시 되돌려 보았을 때, 모르던 사이에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것들이 있다. 내 나이 때의 사람들에게 2000년은 하나의 영점으로 작용한다. 10년 전 하면 1990년을 말하는 것 같고, 2000년이라는 완전한 숫자 이후로는 그다지 커다란 역사적 변화 없이 현재가 연장된다는 느낌이 있다. 마지 과거와 현재라는 것이 19세기와 20세기 같이 역사적인 분기점을 사이로 개인적인 것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불현듯 갑자기 무언가가 변했다는 느낌이 (아주 미세하게) 스쳐 지나갈 때면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머릿속을 채운다. 그런데 나는 내가 그것으로부터 나 혼자서 멀어진 것인지 세상이 모두 그것으로부터 멀어진 것인지를 명확히 구별해 낼 수가 없어서, 그냥 가만있었다. 음 다시 말하면 나와 세상이 이별한 것인지 그저 내가 살고 있는 같은 세상이 변한 것인지 모르겠는 느낌. 그런 느낌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예술은 왠지 죽은 것 같다. 예술은 언제까지 살아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정말 죽은 것 같다. 니체나 헤겔이 말하는 죽음과 다른 느낌으로, 이제는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예술의 빈자리를 이상한 것들로 매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도 이랬나? 예전에는 그래도 예술에 대한 환상이라도 떠돌고 있었던 거 같은데, 아직도 그 환상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까? 선물 배달하는 산타클로스처럼? 하여간 나에게는 없는 것 같고, 현상에 대한 기억도 없어져 간다. 얼마 전에 하은이가 고흐의 작품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냐고 물어봤는데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실 있을 수도 있고 지금의 나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상태에 처해있는 것이다. 나는 미술관에 자주 가고 미술 관련 서적들도 읽고 미학 스터디도 참여하고 있는데, 미술에 대한 이와 같은 집착이 오히려 미술의 내핵에 접근하게 해서 상실감을 일으키는 것일까? 정말 이것뿐일까라는 끝없는 질문의 연속 안에서 나는 상실감이라는 필연적 귀결에 도달한 것일까. 쯧
물론 여기에는 정신적인 요인도 작용을 한다. 언젠가부터 내 몸에 달라 부은 불안감이라는 감정이 현재의 범위를 너무 작게 좁혀 버려서 어제 했던 일도 아주 오래전에 했던 일 같고 미래는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어느 정도 별거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떠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내 시야 안에서 조각조각 분해되어서 총체적인 상을 형성하지 못하는데 내가 그걸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게 마치 정확한 분석인 듯 착각하게 될까 봐 두렵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가 정말 미쳐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일 년 전에도 그랬나? 그것도 기억 속에서 다시 끄집어낼 수 없겠지… 왜 이렇게 늪에 빠진 것 같을까. 치료가 필요한 아픈 사람이 된 건지, 흔히 말하는 어른이 되는 건지, 누가 뭐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 나는 지금 병실에 누워있는 치매환자 같다. 뭐라도 기억해보려고 더듬더듬 그런데 모든 게 다 멀어진다.
이상하게 말이 길어졌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오늘 효창공원 역 근처에 있는 아카이브 봄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워낙 유명한 신생 공간이기 때문에, 책 속에서 많이 본 건물이었다. 낡은 단독주택들 사이로 있는 하얀색 건물, 일층에는 카페같이 생긴 알 수 없는 실내가 불 꺼진 채있었고 2,3층으로 전시가 있었다. 비평가들은 이 공간을 정말 정말 자주 거론하는데 그에 비해서 대중적으로 정말 알려진 바가 없는 건물이다. 아카이브 봄 인터넷 홈페이지는 2018년 이후로 업데이트되지 않고 있고,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들려오는 정보는 많아서 한 번쯤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효창공원역 근처에는 높은 아파트가 있었다. 생각보다 점심의 햇살이 더워져서 패딩을 벗었다. 이 건물에 집을 살려면 얼마일까 생각했다. 종로 쪽으로 오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 가본 아카이브 봄 건물은 굉장히 작았다 주변으로 오래된 부동산과 세탁소가 있었다. 이미 한 명의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한 명으로 이미 공간이 거의 꽉 차서 둘이 있으면 어색할 정도였다. 그래서 2층을 대강 둘러본 뒤 3층 먼저 전시를 보게 되었다.
3층은 빛을 암막하여서 영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영상에서는 칼을 든 남자와 그 외에도 칼에 관한 다양한 인스타그램 영상들이 콜라주 되어있었다. 영상마다 중 하단에 인스타그램 계정의 정보를 표시해 주었다. 영상이 모바일 환경영상처럼 세로로 되어 있다는 게 재밌었다. 세로로 긴 공간과도 잘 맞았다. 소셜미디어와 이미지 정보화의 사회에서의 신체를 다루면서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어놓는 것이 유행인가? 많은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흔한 요소여서 분위기 자체는 사실 새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루는 주제는 게임 특히 게임에서 나타나는 검이었다. 검은 '휘두르다'라는 입력값을 '베다'라는 출력 값으로 도출시킨다. 검의 살상 기능은 총이 대신하고 나서부터 실제로 쓰이진 않지만, 사무라이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부상하면서, 게임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총을 다루는 행위인 ‘쏘다’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관용어로도 쓰이고, 발사하다, 사격하다 등 다양한 단어로 대체 가능한 것에 비해 베다는, (자르다와는 다른 의미다.) 대체 가능한 단어들이 많이 파생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언어 속에 깊숙이 침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때 역사적으로 언어의 쓰임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들어와서 이 모든 것은 클릭의 운동 값으로 돌아갔다.
이번 작품 ‘베기의 알고리즘’은 ‘하룬 하로키’의 작품 <평행 1 - 4(로마자)>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고 <레드 레드 리뎀션>처럼 서부극을 주제로 담은 게임과 하프라이프, 지티에이 같으 레퍼런스도 전시 입구에 언급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작가의 일기와 같은 모습의 글이 벽면에 적혀있었는데 날짜 밑에는 북한 근처에 땅을 사서 거기에 작은 집을 짓고 거주하는 생활의 기록이었다. 무엇도 소유하기 힘든 시대에 (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과 겹쳐 보였다.) 작은 땅을 사서 소유한 채로 거주하는 작가를 보여주는 영상이 옆에 전시되고 있었는데. 한국이 아니었으면 휴전선 근체 비닐로 지어진 집에서 일본도를 옆에 두고 렌더링을 하고 있는 이상한 콜라주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의 인터페이스를 흉내 내서 채팅으로 서사를 이어가는 것도 재밌었다. 인스타그램 디엠 같은 것도 섞여있고…. 의자를 놔주어서 좋았다. 강한 음악이 전시장 전반에 깔리고 조명이 어두워서 내가 전시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이 좋았고. 시립미술관에서는 크게 느껴지지 않던, 미술관에 왔다는 느낌이 드는 게 좋았다. 상실감이 조금은 채워진 느낌이라고 할까. 전시장은 뭔가 있다 이게 내 기억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균열의 틈 속에서 나를 꺼낼 수 있게 놓아두는 상태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