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욱 Aug 15. 2023

몸에 힘주어 간신히 내뱉는 진실의 말이 결핵환자의 기침소리 처럼 단어의 형태를 잃어버린 소음이 되어서 공중에 흩어진다. 오직 순간을 상기할 수 있는 자만이 나의 말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이를 지닌 단어들은 자신의 의미를 곧바로 내비치지 않는다. 시간, 아니 시간 그 자체보다, 피곤함, 지침, 생기, 일정한 감정들의 흐름과 뒤바뀜, 곧 그것의 무의미함을 깨달을 때 까지의 2~3주 가량의 시간 뒤에도 남는 어떤 대화의 흔적들은 분명, 내 내면으로 부터 피어나는, 영원히 새겨질 의미를 남기기에 충분 할 것이다. 


어떤 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삶을 끊는다. 나의 힘이 시작되는 근원적인 지점을 나의 손 끝으로, 노동력으로 종결시킨다는 것에는 숭고한 의미가 있다. 자기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을 실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실천하는 자가 깨닫지 못할 수도 있으나,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 이룩할 수 있는 거대한 논리적 귀결일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에 준하는 고통을 행위의 동력으로 삼아 하루를 나아가는데, 이 때 고통과 괴로움을 자아의 생활에 동력을 부여하고 신체를 움직이는 끈이 되기에, 쉽게 그것으로 벗어날 수 없다.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고통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모순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 


왜 그래야만 할까? 이는 문명의 저주다. 문명이 개인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당신이 특별히 뭔가를 잘못한 것도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시험에 떨어질까봐 불안한것,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봐 불안하고, 혼자있으면 우울하고, 누군가를 만나면 괴롭고, 속세적인 문제들에 골치가 아프면서 위로밭는 스스로에 대한 속박은 인류가 거대해지기까지 감당해야 했던 자연에 취해진 고통이 등가로서 인간 하나하나 개개인에게 부여된 것이다. 문명인은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멍청하거나 뻔뻔하지 않고서야, 그런데 멍청함, 뻔뻔함은 논리의 부정이기 때문에 발목에 내가 지금 서있는 곳 아닌 다른 어딘가에 고무줄을 묶어 놓고 다리에 힘주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같다. 안그러면 질질 끌려가기 쉽상이다. 그렇게 추한 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문명인은 과학적으로 사고한다. 과학적 사고 안에서 개인은 우울해진다. 왜? 온갖 살아있지 않은 것들이 너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너의 무의미함에 대해서 파고드니까. 그런데 딱히 도망칠 수도 없지 않다. 


웃기지 않은 것들로 세상이 가득 채워지는 것. 다같이 마음껏 혐오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서로 동질감을 느끼고 껴않고 엉엉울던 작은 것들이 이제는 서로 죽자고 달려들고 싸우는 것. 이러한 어리석은 자기 통제력 상실한 혼란이 분노를 일으키지만. 밥 한끼 시원한 곳에서 (따뜻한 곳에서) 먹는 댓가가 바로 이런것이라고 훈계들으면서 하루를 꾸역꾸역 삼키면서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다. 삶은 오늘 하루를 바라보는 시선과 삶 전체를 관망하는 시선에 따라 그 의미와 모습이 많이 달라지지 않은가. 삶 전체를 둘러본 다는 것은 오늘 내가 얼마나 멍청한가 (어리석은가)를 아는 것이다. 그걸 긍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어리석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위들에 진심으로 몰입하면서, ‘반진리', ‘반보편성'에 흠뻑 빠져드는 즐거움이다. 삶 전체를 관망할 때, 나는 하루에 모든 행위를 무의미하고 잘게 부서진 부분의 조각들로서 여기게 된다. 근데 그게 말이되나? 당연히 안된다. 그래서 진리추구하는 건 극단적인 자기 반성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하루의 인상은 우리 앞에 너무 강렬하게 다가온다. 소위 ‘빡’치는 사건들과 누군가 나를 갑자기 버릴 것 같은 두려움. 이런 걸 어떻게 그냥 제쳐둔단말인가. 하루를 구성하는 매 초 순간의 생기있는 감각적 체험들을 단지 허상이라고 둘러대는 것. 그것이 반성적으로는 가능 하더라도 (돌이켜보니 의미없더라..) 현재적으로 가능한가? 이 질문은 내가 시간이 지나며 나 스스로에게 계속 되묻는 질문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 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이스테시스, 내가 받아들이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감각이 통합된 지각으로 완성되기 까지 지체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밀어두고 싶었던 부적합한 판단, 오해, 실망들과 싸워야한다. 이런 애매모호한 중간시간의 감정들에 대해서 계속 외면한다면 우리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인간 상을 목적으로 두고 계속해서 돌이나 굴리는 무의미한 존재 이상이 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들은 논리적인 귀결을 이룰수 없다. 시의 구성이 논문의 구성보다 ‘사실'을 묘사하는데 적합할 것이다. 나는 물론 결론을 제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를 쓸 수 없는 시간이 왔으며, 깔끔한 귀결이 없으면 어떤 이야기도 전달 될 수가 없다. 깔끔한 이야기는, 자기를 속이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거짓되지만 많은 사람을 설득하기에 효과적이다. 나 또한… 무언가 완벽하게 설계된 집을 짓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그럴 능력이 없어서인지, 결국은 모호한 서사를 가진 길로 계속 빠져들게 되는 것이고 길목 길목에서 발견되는 풍경들이 다만 목적지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확신할 수 없는 경향성을 계속 찾게 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인싸와 아싸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