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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Oct 02. 2023

노동자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감상문

원자 폭탄 팻 맨과 리틀 보이 

영화 오펜하이머는 딱히 내 취향에 맞는 영화는 아니었다. 놀란 감독에게서 내가 좋아하는 점은 그의 상상력과 서사를 완성해 나가는 능력이다. 그러한 장점이 가장 극대화되는 영화는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등 순수 창작서사로 구성된 SF 판타지 영화들이다. 일본 만화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클리셰적인 장면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구축하는 방식이 나에게는 흥미롭다. 가령 인셉션에서 등장인물들은 팀을 이루고 각자의 팀원이 각자의 강점과 개성을 지닌 게 마치 카우보이 비밥의 우주선 비행사들의 팀워크를 떠올리고 인터스텔라의 인류의 끝을 향하고 구원을 말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20세기 소년의 황량한 배경을 떠올린다. 그리고 전 인류적인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는 키가 한 개인의 사소한 감정변화 ( 인터스텔라에선 부성애, 20세기 소년에선 열등감) 도 많은 점 닮아 있다.


영화가 만화적인 연출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는 캐릭터와 사건을 중심으로 표현할 수 있는 깔끔한 서사를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점. 둘째는 그만큼 표현하는 캐릭터와 사건이 다소 플랫 하다는 점이다. 나는 이전부터 놀란이 표현하는 캐릭터의 단순성을 다소 아쉽게 생각했다.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자아가 차지하는 영역은 매우 거대하고 주변인물들은 그 자아가 투사하는 상에 의해 다소 대상화되어 나타난다. 여성캐릭터는 거대한 남자 주인공 캐릭터 옆에서 언제나 ‘내면의 목소리'로 지혜로운 메시지를 속삭이는 역할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영화 내 배경을 구성한다는 것은 그만큼 놀란이 한 개인 내부의 감성과 고뇌등 철학적인 주제에 관심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고 실제로 그러한 세계관을 흥미롭게 묘사해 내지만, 타자에 관한 다소 단순한 캐릭터 설정은 철학적인 주제를 다소 올드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오펜하이머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의 개인적인 자아가 많이 투영된 캐릭터여서인지, 다소 미화되어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초반엔 들었다. 인류의 멸망을 불러올 수도 있는 원자폭탄이 처음으로 개발된 스토리를 그리는데 전쟁과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잘리고 오펜하이머 개인의 시선에서만 풀어가는 스토리가 (물론 원작 책이 그랬겠지만은) 그런 고뇌조차도 숭고한 신의 고뇌로 승격시키는 것 같아 놀란이 구체적으로 뭘 말하고자 하는지 와닿지 않았다. 미국을 인류의 구원자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것인지.


오펜하이머와 마르크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영화 초반 오펜하이머의 행적을 보여주는 와중에 눈에 띄는 것은 세계 최초의 F.A.E.C.T 창설과 공산주의 파티에 참여하는 등, 공산주의 관련 활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추후 스파이로 의심받아 비밀정보 접근권한도 빼앗기게 된다. 공산주의에 관심을 보이고 공감을 했던 오펜하이머가, 그러한 사실로 인해 미국 정부로부터 의심받고 비판을 받는 그 전개 자체가 공산주의가 변화한 20세기의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했다.


미국과 소련과의 본격적인 이념전쟁이 시작하기 이전에 오펜하이머가 관심을 보였던 것은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노조운동이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말을 빌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노동자들의 빈곤에 관해 설명한다.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할 때, 그 생산물이 생산자 자체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를 소유한, 자본가의 소유로 넘어갈 때, 생산자, 그러니까 노동자는 자신이 만드는 것을 직접 소유하지 못하며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을 위해서 원자폭탄을 만든다는 계획에 공감하고 참여한다. 그러나 점차 프로젝트가 완성되어 갈수록 자신의 생산물에 노동자 이상의 몰입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산물이 계획과 목표 즉 전쟁의 종료를 넘어서는 더 큰 부정적인 결과물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이러한 지점을 언급하지만 그가 맡은 직책과 책임을 넘어서는 발언들은 모두 제지당한다.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을 독대하는 순간 자신이 일개 노동자에 불과하고 자신의 산출물에 과몰입하고 있으며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빼앗겼다는 점을 체감한다. 트루먼은 오펜하이머의 위치를 각인시켜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책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주는 제우스는 오펜하이머 내면의 죄책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념전쟁이 시작되는 시기 오펜하이머와 대립하는 미국정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오펜하이머의 내연녀 진 태틀록은 직접적으로 오펜하이머의 공산주의적 성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까? 공산주의자로서의 낙인찍히는 청문회 자리에서 나체로 진태트록과 성관계하는 환상 이미지는 이념 대립전쟁 중인 미국에서 벌거벗겨진 오펜하이머의 이념과 사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의 자살과 함께 모든 것은 끝났지만, 이념적 공격과 네거티브 요소로서 공산주의는 지속적으로 활용된다. 


노동자로서 디자이너


교수, 프로젝트의 총 지휘자를 한 노동자로 보는 게 다소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영화 자체도 다양한 이야기를 복합적으로 담고 있고, 애초에 전기적 영화에 하나의 해석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자를 노동자로 계속 보게 되는 이유는 내가 디자이너이기 때문인 것 같다. 디자이너도 개인 내부에서 일어나는 실험과 시도들을 보편적인 사회적 쓸모로 옮겨 놓는 직업이기 때문에, 나의 정신적 과정의 결과물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업적이 단순히 그것이 성취한 정치적, 시장적 효과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노벨상과 같은 신뢰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통해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로 가치판단을 하는 것처럼 디자인도 그것이 생산하는 매력적인 상품 이전에 시지각적 경험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문화와 커뮤니티가 형성되면 어떨까 하는 희망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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