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은 루터가 “인간이 만든” 신(변질된 로마 가톨릭)을 죽이고, 프랑스혁명이 국민을 착취하는 왕을 죽이고, 로크와 루소가 그려놓은 밑그림(사회계약론)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나치즘, 파씨즘)을 반성하며 구체적 형태를 그려가는 과정이다. 지금까지 그려진 그림에서 개인은 모든 인간이 존엄함에 합의하고,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존엄(인권)을 지키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인간’의 범주에 “모든 인간”이 속하지 못했다. 17세기 후반 로크가 주장한 자유로운 시민은 “돈 있는 남자(유산계급)”로 제한되었다. 약 100년 뒤(1776년), 미국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라는 영화 대사 같은 선언과 함께 국가를 세웠지만, 다음 세기에 16번째 대통령을 선출하고서야 “모든 사람”에 흑인 노예를 포함시킨다(1863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 놀랍게도 이 나라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갖게 된 해는 또 한 세기가 지난 1920년이다.
그리고, 어쩔 땐 미국보다 더 미국스러운 한국에서 여성은 또 한 세기가 지난 근래가 되어서야 스포츠를 누리기 시작했다.
출판계의 작은 트렌드 하나가 생겼다. jtbc 뉴스룸에서도 소개했지만 ‘운동하는 여성’들이 본인의 체험을 글로 써내고 있다. 운동하는 여성의 체험이 왜 특별한 것이 될까? 한국에서 운동이나 스포츠는 20세기가 지나갈 무렵 국가주의에 시달리고, 21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에 시달리면서 엘리트주의적인 모습이 되었다. 지난해(2019년) 활약한 스포츠혁신위원회의 3차 권고문은 지금까지의 스포츠가 “젊은 남성 비장애인”의 전유물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니까, 운동하는 여성의 체험이 주목받는 이유는 지금까지 여성이 운동을 향유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유행은 언제나 결핍을 반영하니까.
여성이 운동을 누리지 못했다고 보기에는 헬스장에서 여성회원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다. 필라테스는 오히려 여성의 전유물 아닌가. 종목의 차이는 있지만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못 박을 만큼 운동하는 여성의 수는 적지 않다. 결핍이 없어 보이는데, 이 경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핍은 양(quantity)에 있지 않고 질(quality)에 있다. 여성이 헬스장 문을 여는 건 더 이상 어색한 사회가 아니지만, “살 빼려고 운동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놀랍게도 내가 만난 모든 트레이너는 ‘날씬해지려고 운동하는 게 아니다’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걸 무척 어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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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고기도 아닌데 그는 자꾸 나를 저울 위에 올리려고 했다.
-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중에서
물론 건강한 체형을 가꾸는 것도 운동을 누리는 한 가지 형태지만, “살 빼는 거”는 보통 운동이나 스포츠의 부수적 이득이다. 스포츠에 몰입한 사람이 누리는 운동 향유란 얼마나 다채로운가.
외적인 부분에만 집착하지 않아도 운동이 내 몸에 가져오는 변화를 상찬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운동은 몸의 외적인 부분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최대한 시간을 짜내 한 최소한의 운동이 내게 주는 진짜 성과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도 어디든지 다니는 것처럼. 정수기 생수통 정도는 전혀 무겁지 않다. 똑바로 허리를 세우고 일하는 게 좋다. 나는 운동으로 내 몸의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일상을 더 잘 살아갈 힘을 기른다, 조금씩.
-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중에서
그러니까 복싱은 주먹질이 아니다. ... 모르고 보면 원초적이지만 알고 보면 인체의 경이로움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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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았지만, 때렸지만 서로 대등한 복서로서. 어느 한쪽이 억지로 허락한 적도 없는 지배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 대등한 관계로서. 무작정 싸움박질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을 수없이 훈련한 후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사각 링 안에서 벌이는 최선의 한 판. 그게 스파링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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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소리 높여 서로를 응원하고 칭찬했다. 모두 행복감과 뿌듯함에 흠뻑 취해 의기양양한 상태로 각자의 트로피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생각했다. ‘이토록 순수한 동기, 그저 운동하겠단 동기 하나로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발산되는 에너지란 얼마나 특별하고 강한가.’
-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중에서
IOC(국제올림픽위원회)와 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20세기 후반에 나란히 스포츠를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보편직 인권의 하나로 규정했다.
스포츠 활동은 인권이다. 모든 개인은 우정, 연대, 페어플레이 정신의 상호 이해를 수반하는 올림픽 정신 안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이 스포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The practice of sport is a human right. Every individual must have the possibility of practising sport, without discrimination of any kind.and in the Olympic spirit, which requires mutual understanding with a spirit of friendship, solidarity and fair play.
-올림픽 헌장 기본 원칙 제4조, 1908
체육활동, 신체활동, 스포츠는 모든 이를 위한 기본 권리이다.
The practice of physical education, physical activity and sport is a fundamental right for all
-유네스코, “체육교육, 신체활동 및 스포츠에 관한 국제 헌장 제1조”, 1978
스포츠는 과연 인권인가? 인권이란 인간 존엄성을 담보하는 보편적인 권리인데, 스포츠가 여기에 해당할까? 생명을 유지할 권리, 재산을 소유할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처럼?
도대체 ‘스포츠란 무엇인가?’라는 답 없는 본질 물음으로 이어져야 할 것 같지만, 그럴 필요 없다. 인권은 절대적 개념인 듯 소비되지만, 사실 시대적,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인간의 생명은 존중받아야 하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하자. 그럼 동물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돼지고기를 부위별로 음미하는 인간성의 모순이란..
인간만이 특별히 권리를 부여받기 위해 누군가는 ‘이성(reason)’에 호소하고 또 누군가는 ‘종교(religion)’에 호소하지만, 어디에 설득되든 간에 결국 인권은 합의에 의존한다(사회계약론). 합의에 의존하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전체가 합의할 수 없거나 수정, 삭제, 추가되는 영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권이 시대적, 사회적이라는 개념은 제한성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초월성을 의미한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고 수정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와 사회는 스포츠를 인권의 하나로 합의할 필요가 다분하다. 에티오피아의 마라톤에서부터 캐나다의 아이스하키까지 빈곤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대부분의 나라에서 스포츠는 촘촘하게 자리 잡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이것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들로 이어지는지 우리는 지겹도록 보아왔다. 정유라(입시학사비리), 조재범(선수성폭행), 문우람(승부조작)이라는 일각 아래에 얼마나 큰 빙산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스포츠를 탓하지 않는다. 이 같은 불행은 스포츠의 영향력을 오용하고 남용한 인간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기 때문이고, 또한 건전하게 스포츠를 누릴 때 주어지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알기 때문이다. 신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사회적 건강, 유희성, 몰입감, 행복감 이티씨.
낄낄, 낄낄. 방금 전까지 서로를 죽어라 패던 사람들끼리 나누는 웃음과 대화. 그 모든 게 좋아졌다.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중에서
그래서 스포츠는 모든 사람이 행복 추구를 위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되어야 한다. 스포츠가 인권의 하나로 여겨지게 될 때, 특정 집단의 독점과 불순한 의도의 오남용을 방지할 수 있고, 운동하는 여성의 체험도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것이 될 수 있다.
처음 찾아간 사람에게 “다이어트하러 오셨죠?” 하고 묻지 않는 운동 센터, 아파도 무작정 참으라며 회원을 성의 없이 대하지 않는 운동 센터, “뚱뚱하고 돈 많아 보이는 회원한테 개인 지도 영업해!” 하고 재촉하지 않는 운동 센터를 찾아 10년 넘게 돌아다녔지만 못 찾았다.
- "여자는 체력"중에서
생물다양성의 중요성은 생태계의 유지를 거쳐 인간 종의 생존으로 귀결된다. 수 세기 동안 무분별하게 다른 생물을 이용해온 인간이 멸종위기종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유는 생물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결국 인간 종의 생존을 위해서다.
스포츠를 누리는 사람이 다양해야 스포츠도 다양해진다. 그래야 스포츠가 산다. 스포츠의 생존을 위해 “젊은 남성 비장애인”의 틀을 깨야 한다. 스포츠에 소외된 사람들,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인, 난민 등 모두가 스포츠를 누리는 스포츠의 보편화, 스포츠의 인권화가 실현되길. 그래서 스포츠의 오남용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들이 사라지고 스포츠가 가진 힘이 건강하게 사용되길.
그러나 어떤 트레이너도 내 생리 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성 고객을 위해서 생리 기간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며, 호르몬 변화 주기에 맞춰 운동을 설계할 수 있는 ‘남자’ 트레이너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중에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서로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포옹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주먹을 섞는 시간이 치열했을수록 서로를 더 가까이 안게 된다. 그때 정말로 일종의 ‘옳은 스포츠’를 수행했다고 느낀다.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