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축구는 문화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은 20년 만에 월드컵을 되찾은 프랑스와 킬리안 음바페라는 10대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벨기에와 크로아티아 같은 소국의 활약이 불러일으키는 서민적 공감과 혁명적 쾌감 덕분에 더욱 즐거웠다.
월드컵 때만 되면 우리나라 국민은 너나 할 것 없이 축구 팬이 된다. 월드컵 열기만큼은 여느 축구 선진국에 뒤지지 않지만, 텅 빈 K리그 경기장은 곧 현실을 자각하게 한다. 대한축구협회는 2002년 월드컵의 성공 여세를 K리그 발전과 흥행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축구를 아끼는 팬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자국의 프로 리그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곤 한다. 월드컵 때마다 회자되고,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과연 이 같은 비난은 정당할까? 비난한다면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면밀히 따지고 보면 비난할 대상을 특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이전에 이해되어야 할 문화 현상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의 열기와 텅 빈 K리그 경기장.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기 전에, 축구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발전하고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프로스포츠는 지역감정을 먹고 발전한다. 사실 한국은 영국이나 스페인 같은 나라에 비하면 지역감정이 심하지 않다. 유신의 잔재로 일부 지역감정이 남아있지만, 실제로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정신이 있지 않는가. 더군다나, 프로야구가 먼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한국 국민의 지역 정체성은 이미 지역의 프로야구팀과 결속되어있다. 야구팬은 국가대표 팀보다 지역 팀에 더 많은 애정을 쏟는다. 그들이 정체성을 투영한 야구팀은 국가대표팀이 아니라 지역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축구팬은 국가대표팀에 그들의 정체성을 투영한다. 야구가 지역정서를 먼저 차지하기도 했지만, 축구는 월드컵 등의 국제 대회를 통해 발전했기 때문이다. 지역정서는 야구에, 민족(국가) 정서는 축구에 투영하는 것이다. 그러서일까?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의 또 다른 이름은 “FC국대”다.
축구는 문화다. 영국에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간 축구는 각 국가와 민족의 기질, 역사, 종교, 정치, 지형, 기후 등의 특성과 어울려 발전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축구만 따로 떼어서 논할 수는 없다. 홍대선, 손영래 작가 공동 저서인 ‘축구는 문화다’는 각국의 복잡 미묘한 축구 문화를 재미있게 알려준다.
예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클라시코 더비를 보자. 이 두 팀은 그깟 공놀이에 왜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단순히 리그 1, 2위를 다투는 팀이기 때문일까? 늘 전쟁 같은 이 두 팀의 경기는 사실 전쟁 대신의 경기가 맞다. 스페인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중 마드리드를 수도로 하는 카스티야족과 바르셀로나를 주도로 하는 카탈루냐족이 대표적이다. 스페인은 카스티야 왕국을 중심으로 여러 왕국과 민족을 봉합해 탄생한 국가로 역사적으로 민족 간 갈등을 많이 겪어왔다. 이중 스페인 최대 항구도시인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한 카탈루냐 지역은 스페인에서 가장 민족 정체성이 강해 20세기 이후 가장 활발하게 분리독립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카탈루냐는 비교적 최근인 18세기에 합병되었기에 다른 어떤 민족보다 독립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스페인 정부가 이들의 독립 의지를 묵살하고 독립 불가 입장을 고수하면서 이들 지역 간 감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근대에 접어들어, 이들은 총칼 대신 축구화를 신고 싸우는데 그것이 엘클라시코 더비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둘의 지역감정에서 스페인 축구는 크게 발전했다. 스페인 축구 문화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보면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가 단순히 순위 경쟁을 위해 피 튀기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국가에서 축구를 둘러싸고 벌어진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축구라는 문화를 더욱 다채롭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축구선수라면 축구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축구선수가 아니더라도, 영국에서 축구와 럭비가 어떻게 나뉘게 됐는지, 이탈리아는 왜 빗장수비(카테나치오)를 위시로 실리 축구를 발전시켰는지, 브라질의 축구는 왜 삼바인지,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현대 축구의 기본 전술인 ‘토털 풋볼’이 탄생했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는 읽기 충분한 흥미를 유발한다.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의 이야기를 살짝 엿보자. 오렌지군단의 역사적 면모를 알면 현대축구 전술사에 한 획을 그은 스페인의 ‘티키타카’를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1974년 네덜란드 대표팀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으로 기억된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전술인 ‘토털 풋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방 압박으로 대표되는 현대축구의 기본 전술인 토털 풋볼은 축구 전술사에 몇 없는 혁명이었다. 현대 축구는 토털 풋볼 이후부터라고 보면 된다. 토털 풋볼의 창시자는 에레디비시(네덜란드 프로리그)의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리누스 미헬스’이다.
“축구에 혁명은 없다. 만약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유일하게 1974년의 네덜란드 대표팀뿐이다.”
-전 디나모 키예프 감독,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이전까지만 해도 축구 전술은 공격수와 수비수를 나눈 정도였다. 공격수는 공격만, 수비수는 수비만 했다. 따라서 공수 간격은 매우 넓고 경기 템포도 느렸다. 그러나 미헬스는 11명의 선수를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었고 이 유기체는 소용돌이처럼 경기 내내 정신없이 상대방을 압박했다.
미헬스의 토털 풋볼에서는 공격수도 수비를 하고 수비수도 공격을 했다. 11명의 선수가 달려들어 공을 빼앗고 11명의 선수가 달려들어 골을 넣는 것이다. 공격수만 공격하고 수비수만 수비했던 상대방으로서는 11명이 동시에 달려드니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11명의 선수가 생각 없이 달려들었던 것은 아니다. 공격과 수비는 물론, 선수 간의 간격을 짧게 유지하고 압박으로 인해 발생한 빈자리는 근처에 동료가 신속하게 채워주며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토털 풋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11명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진두지휘할 사령관이 필요하다. 마침 네덜란드에는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다.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 중 하나인 크루이프는 우아한 드리블과 정확한 패스로 유명하지만 그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전술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탁월한 경기 운영 능력이었다. 토털 풋볼에 최적화된 선수였던 것이다. 그를 품은 미헬스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 전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크루이프와 함께 토털 풋볼의 위세를 떨친 미헬스는 크루이프와 함께 유럽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FC바르셀로나로 가게 된다. 둘의 입단과 함께 토털 풋볼을 이식받은 FC바르셀로나는 그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5:0으로 이기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축구화를 신은 피타고라스’, 요한 크루이프의 별명이다. 그는 단순히 몸만 잘 쓰는 축구선수가 아닌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던 선수였다.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크게 성공하는데, 그의 전술은 스승 미헬스의 축구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현재 최고의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가 FC바르셀로나에서 감독으로 활약할 당시 주축 선수였다. 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의 축구 철학은 1군 선수만 아니라 7~9세 유소년 선수도 함께 공유했다”고 회상한다. 과르디올라가 현대축구 최고의 전술가로서 시대를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크루이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선수 간에 좁은 간격 유지, 빼앗긴 위치에서부터의 강한 압박을 통한 빠른 볼 소유권 탈환, 한 포지션에 머물지 않는 유기적인 움직임, 과르디올라가 바르셀로나에서 완성한 ‘티키타카’는 미헬스와 크루이프가 전수한 토털 풋볼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것이다.
축구를 문화로 이해하면 축구를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분별없이 비난하거나 맹목적으로 찬양할 필요가 없다. 축구는 인류를 구원하는 종교도 아니지만, 하등의 쓸모없는 그깟 공놀이라고 할 수도 없는,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만들어가는 하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축구는 문화다.’ 이 책을 통해 축구를 문화로써 이해하게 되면 세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축구를 보는 시야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