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갑표 여사
누군가에게 고양을 소개할 때면 중남미문화원은 나의 필살기와 같다. 고양을 방문한다 하면 반드시 추천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산길로 차를 몰아야 하는 적잖이 외진 곳에 있긴 해도, 한국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보석 같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과 이국적인 조각들이 우리를 반겨주는 곳이다. 바다를 건너온 전시물들과 한국적인 정원의 미(美)가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독특했다. 입구에서부터 문화원의 설립자를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다. 어느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방문객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니 큰 소리로 외치셨다.
“나? 여기 만든 할머니야.”
바로 중남미문화원의 설립자이신 홍갑표 여사님이었다. 91세. 그럼에도 내가 만난 그분은 나이를 잊은 듯한 호방함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평생을 바쳐서 만든 문화원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으로 가득하신 분이었다. 사진 같이 찍고 가라면서 나를 잡아끄셨다.
“관상이 참 좋네. 혼자 왔으면 나랑 얘기나 하다 가자.”
그렇게 갑작스레 예상에도 없던 만남이 시작되었다. 홍 여사님은 이제 무릎이 많이 아프셔서 돌아다니기 힘든 상황이라, 내 손을 잡아 당기며 문화원 이곳저곳을 구경 시켜주셨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심은 나무들과 모아 온 전시물들에 관해 설명하셨다. 심지어는 당신 부부의 집안까지 소개하셔서 내실(內室) 장식까지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중남미문화원은 한 외교관 부부의 꿈이자 결과다. 이복형 문화원장님은 본래 30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중남미 지역을 담당했다고 한다. 정년을 맞이하게 된 후, 농사를 짓기 위해 구매한 땅 위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그동안 중남미에서 수집한 예술품과 유물들이 그 양과 질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나자 결국 박물관 건물을 따로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미술관, 조각공원, 연구소 건물이 차근차근 더해졌다. 멕시코의 과달라하에서 우연히 보게 된 레따블로(Retablo 성당 제단 예술품)에 반해 종교미술관 건물도 만들었다. 특히 종교미술관 건물은 여사님이 직접 설계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렇게 30년. 결국 외교관 내외로 지낸 시간만큼 문화원에 바친 시간이 비슷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니, 사람들이 다 대사님(여사님은 남편분을 매번 대사님이라고 칭하셨다) 돈으로 이걸 지은 줄 알잖아. 공무원이 무슨 돈이 있어? 공무원은 천 원짜리 한 장 대출이 안 나와. 물론 공무원 중에 도둑놈들이 많아서 돈을 벌 수는 있어도. 대사님은 그런 거 전혀 모르고 산 사람이야. 특1급 대사라서 장관급이야. 그런데 돈 벌 구석은 없었어.”
여기서 홍갑표 여사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사실 나도 문화원과 전 외교 대사 이력만을 생각했을 뿐,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민간 박물관이 가능한지 궁금한 적이 없었다.
“내가 대한민국 제1호 여성 신문판매원이었어. 돈 벌어서 그 시절에 동명여중 갔고. 원래 이 땅도 내가 6,000평 농사지으려고 평당 350원에 산 땅이야. 당시에는 김신조 내려오고 그래서 고양 땅값이 쌌거든. 내가 안 해본 일이 없어. 땅 사고 가발, 속눈썹 팔고 수출해서 돈 벌고 그랬어.”
“그러면 여기 남미 유물들은 다 누가 모으신 거예요?”
“예전에는 골동품이라 그랬는데, 다 내가 모은 거야. 원래 한국에 있을 때부터 골동품 같은 거 사 모았거든. 그림 같은 거. 그러다가 대사 부인하면서 주말마다 나가서 뭐 나온 거 있나 하면서 보러 다녔어.”
“아, 원래 한국에서부터 물건 보셨구나. 확실히 미감(美感)이 있으셔서 이런 것들이 보이시나 봐요.”
“이거 내가 미쳐서 만들었어. 미치지 않아서는 이런 거 못 만들어. 예술은 창조이자 동시에 모방이야. 그래서 다 나눠주기 위해서 있는 거고. 내가 그래서 이거 재단 만들어서 다 사회에 환원했어. 돈 한 푼 안 남겼어. 어차피 맨몸으로 가는데 기업이든 종교든 세습하는 것들은 이해 안 돼. 자식을 주면 2대가 못 가.”
그렇게 열을 내신다. 평생을 모은 물건들이 전시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당신의 말처럼 모방되기 위해서 있다는 것. 그걸 알았기 때문에 재단의 설립자가 되었다.
“내가 쓴 책 읽어봐. 거기에 다 써놨어.”
여사님께서는 책 한 권을 내 손에 들려주셨다. 졸지에 입장료만 내고 더 비싼 책 한 권 더 얻게 되었다. 책 제목은 ‘지금도 꿈을 꾼다. 태양의 열정으로’. 10년 전에 쓴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펜을 가져와서 맨 앞 장에 정성스럽게 사인도 해주셨다.
“내가 여기에 돈 어떻게 벌었는지 다 썼어. 사람들이 돈 버는 얘기가 있어야 읽잖아. 다들 대사님 돈으로 여기 문화원 지은 줄 알아 내가 그게 억울해서 이 책 썼어.”
당신이 보여주신 수많은 상장과 표창장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79년도에 받은 것이었다. 당시에 외교관으로 있다 한국에 잠시 들어왔는데, 그 사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해버려서 외교부 장관 이름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참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에 남편분이 공무원 일을 하신 것이다. 퇴직금으로 이런 문화원을 지을 여력이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설립자이신 여사님의 고생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건물을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이자 비용을 내느라 너무 고생해 후회도 많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하나님 믿으니까 이걸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힘들 때는 원망도 많이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감사해. 고난은 감사할 일이야. 고난 덕분에 사람에게 철학이 생기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거야. 넌 하나님 믿나?”
“예. 집안은 가톨릭이에요.”
“그래. 중남미도 90%가 바로 가톨릭이야.”
친절한 설명도 잊지 않으신다.
“난 원래는 불교 믿었는데, 대사 부인 한다고 교민 기도회 하면서 하나님 믿었어. 그런데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다 같은 말이야. 나 죽어서 천국 가려고 하나님 믿는 게 아니야. 죽어서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아.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걸 이겨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거지.”
2. 만남을 마치며
가끔 내 삶이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할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떤 노동과 꿈도 빛이 바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삶을 통해서 다음 세대에게 공간을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홍갑표 여사님이 남편분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8살 때였다고 한다. 전쟁으로 피난 간 대구에서였다. 이후 연애를 시작했는데 당시 보기 드문 여대생이었고, 남편분은 통역장교였다고 한다. 결혼 한 이후 신문을 보는데 호주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니 시험에 합격했고, 유학을 다녀오니 외무부에서 바로 임용되었다고 한다.
나는 어느 노부부의 삶을 듣고 50년대 아무것도 없었던 나라에서 신혼부부였을 그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을지 떠올렸다. 아마 처음에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어, 문화에 대한 수요가 생길지 어찌 알았을까?
커피 한잔을 하고 피곤해지신 홍갑표 창립자님을 댁에 모셔다드릴 때까지, 그분이 내 손을 잡고 한 말이 있다.
“조금 생각을 내로우하게(Narrow 좁게) 할 필요가 있어. 관상을 보니 엄청 생각이 많을 것 같아.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거든.”
사실 이건 약간의 맥락 설명이 필요한 말이다. 내가 설립자의 인생을 듣기 위해서 나름의 인터뷰를 시도한 만큼, 정반대로 이것저것 여사님이 반대로 나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젊은이가 평일에 홀로 문화원을 찾은 것이 영 마음에 걸렸나 보다. 지금은 다음 직장을 찾기 위해서 준비 중이라고 말씀드렸다.
“땅을 파서 먹고살면 어떻고, 남들이 천하다고 하는 일 하면 뭐 어때? 길가에서 타코(taco 중남미 음식)를 팔아도 배우는 게 있지. 글 쓴다고 했지?”
“네. 사실 여기도 글로 쓰려고 왔어요. 그러다가 잡혀서 이렇게 얘기 나누게 된 거고요.”
“글도 일단 무슨 일이든 하면서 배우면 나름의 관점이 생기고 그걸 담아낼 수 있어. 꼭 작가 일 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래서 글 다 쓰면 우리 문화원에 내고 그러면 되고.”
이건 분명한 나에 대한 당신의 걱정이었다. 나는 얼른 일자리를 잡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모셔다드린 집은 연구실에 붙어있는 공간으로 노부부가 살기에 아늑한 곳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벽면에 가득 꽂혀있는 다양한 언어의 책들이었다. 다른 이의 책장을 살펴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책장은 내가 본 것 중 놀랍게도 다양성을 지닌 것이었다. 언어뿐만 아니라 관심사나 종류까지도.
산 중턱에 있는 식당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실 중남미문화원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식당이다. 정말 맛있는 타코를 판다. 특히 고수 향이 매력적이다. 정원을 바라보며 이국적인 음식을 먹고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어쩌면 인생에 대한 당신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
인생은 일직선이 아니다. 이리저리 갈지자를 그리며 간다. 사실 나는 내 인생이 평탄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불만도, 그리고 공포도 느끼고 있다. 나름의 실패도 겪고 흔들리기도 하면서 나의 20대는 어느새 이것저것 한 것은 많지만, 무언가에 정착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 인생이 무사한지 의문은 쌓였다.
하지만 이제 막 전쟁이 끝난 나라의 18살 홍갑표 여사는 자신이 ‘대사 부인’이 될 것을 알았을까? 그리고 ‘대사 부인’ 홍경표 여사는 자신이 모으는 이 골동품들로 박물관을 짓게 될 줄 알았을까? 결국 나중에 생각해 보면 앞선 삶은 힌트였겠지만, 사후적인 해석일 뿐이다.
정말 여사님 말대로 내 관상이 ‘걱정이 많은’ 관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든 그렇지 않든 걱정을 줄이고 당장 행동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나중에 나도 나름의 내 유산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홍갑표 여사님에게 이곳 ‘중남미문화원’이 그렇듯이.
3. 집 주변 세계여행
마지막으로 조각공원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니, 문화원을 처음 알게 된 날이 생각난다. 고양이란 도시에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살기는 좋은데 그다지 볼 것은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새롭게 살게 된 도시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고양에서 방문해 볼 직한 장소를 물어보고 다니곤 했다. 새로운 동네를 탐험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하지만 많은 답이 뻔하거나 성에 차지 않아 아쉬웠다.
해답을 제공해 준 것은 내 친구였다. 내가 고시생 시절 같이 공부했던 사이다. 역시 우정이란 같이 고생하던 시절에 생기는 것일까. 그 친구도 나도 진로에 있어서 고시 공부를 벗어난 지 꽤 시간이 지났어도 자주 어울려 다녔다.
그 친구는 고양에 곧 신혼집이 될 전셋집을 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들이를 왔다. 그 친구도 어린 시절을 이 고양에서 보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고양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다. 친구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혹시 중남미문화원 가봤어?”
그렇게 친구와 나는 바로 그날 중남미문화원으로 차를 몰았다. 친구에 따르면 고양에서 자란 모든 어린아이는 이 중남미문화원에서 꼭 백일장이나 사생대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자란 고향에서도 그런 곳이 있었다.
처음 친구와 중남미문화원에 가게 되어 내가 느낀 첫인상은 멀리서는 마치 성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울타리가 처진 정원과 벽돌로 만들어진 높은 건물. 우습게도 가본 적 없는 남미의 어느 요새를 떠올렸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니 각종 이국적인 조각들이 반겨주었다. 그때도 압권은 정원이었다. 예쁘게 다듬어진 나무들 사이로 푸른 잔디밭과 붉은 벽돌 건물의 조화. 제일 처음 마주하게 되는 전시관으로 들어가니 가운데 창 아래로 석조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시관은 오래된 성당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벽면을 따라 돌면 남미에서 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토기들을 지나치며 구경하면 선사시대에 원주민들이 믿었던 신상들의 모습이 인상 깊다. 그들은 종교적 성심을 담아서 돌에 자기를 닮은 신을 조각했다. 가슴이 여러 개 달린 여신들과 입을 우악스럽게 벌리고 있는 신들. ‘태양의 돌’이라 불리는 아스테카 문명의 석조 달력을 보며 그들의 세계관을 상상했다.
중앙 홀을 지나면 어느새 전시품들이 스페인 제국 시기 물건들로 변한다. 특히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사치품들이 많았다. 스페인은 500여 년간 남미를 지배했고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 화려함에 감탄만 하게 된다. 앞에서 말했던 원주민의 종교들도 가톨릭의 문화로 변하는데, 대체가 아닌 변화와 적응이 눈에 보였다.
역사와 이국(異國)에 설레는 나에게 이런 공간이 집에서 멀지 않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고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아마도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추억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이 부럽기도 했다. 내 첫 문화원 탐방의 감상이었다.
어쨌든 고양이란 공간은 내 고향은 아니다. 차갑게 얘기하면 그저 결혼하고 살게 된 서울 근교 도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렇게 추억이 하나 쌓이고,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하나 더 늘어간다. 그리고 남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선택지들이 생겨난다.
아마도 나중에 고양이 아닌 다른 도시에 살게 되더라도, 이 도시를 떠올리면 중남미문화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설립자 홍갑표 여사와의 대화, 그리고 했던 생각과 고민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정든다는 것은 늘 무서운 일이지만, 이렇게 고양에 조금 더 정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