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에세이를 올린 지 벌써 두 달이 흘렀다. 두 달 전 나는 대학원 입학 후 처음으로 쓰는 텀페이퍼 폭탄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매일매일 텀페이퍼만 붙들고 있었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조교 일을 하다가 짬이 날 때마다, 퇴근한 후 기숙사나 카페에서 줄곧 글만 썼다. 어쩔 수 없는 과제라서 한다기 보단 내 실력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아주 잘 썼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좋은 피드백으로 보상을 받았으니 노력한 만큼의 수확은 거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총 3과목의 텀페이퍼를 썼고 소논문 형식이었으며 대략 평균 A4 15장의 분량이 나온 것 같다. 쪽수가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의식적으로 양을 늘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자료조사를 하고 글을 쓰다 보니 일정한 분량대로 양이 형성된 것이다. 3번 정도 써보니, '어느 정도 자료 조사를 해야 이 정도 분량이 나오는구나'하는 기본적인 감은 좀 익힌 듯하다. 앞으로 더 많은 양을 써야 하는 논문이나, 적은 양을 쓰는 간단한 과제를 할 때 바로미터가 되어줄 것 같다. 주제를 잡고 어떤 참고문헌을 읽을지만 알아본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은 한 과목당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였다. 그중 5일은 자료조사에 할애했다. 자료조사를 하는 기간엔 간단한 서론조차 쓰지 않았다. 섣부르게 시작하는 대신 정확한 자료조사에 시간을 투자했다. 단행본과 논문, 칼럼을 쭉 읽고 필요할 땐 원서까지 참고하며 내 글의 논지를 어떻게 전개할지 구상하고 어떤 부분을 인용할지 정리했다. 자료조사를 하며 큰 줄기의 흐름이 다 나온 상태이다 보니 본문을 쓰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통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 초고를 완성하고 다음날은 내가 쓴 글을 반복해 읽으며 퇴고를 거친 후 최종 제출을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영화영상이론 전공이다 보니 영화 분석도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일부 주제에 따라 영화 분석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시키지 않아도 텍스트 분석을 즐겨하는 내 입장에선 굳이 영화 분석을 뺄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장점인데 무조건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텀페이터를 마치자마자 방학이 찾아왔다. 재미없게도 이번 방학도 또 공부이야기만 가득할 것 같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놀고 쉬는 걸 더 좋아하며, 책은 한 글자도 안 펴보는 날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에세이 자체가 미래에 내가 대학원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돌아볼 목적으로 쓰는 에세이이기도 해서 특별한 한 에피소드에 집중하기보다는 큰 줄기를 잡아가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뿐이다. 이번 방학은 좀 더 내 실력을 쌓고 정진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래서 영화 보는 시간은 줄이고 독서량은 늘리며,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참여해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번 방학에 하는 세미나는 총 2개다. 하나는 '발터 벤야민'의 전반적인 사상을 훑는 세미나이고 다른 하나는 김호영 선생님이 쓰신 『영화 이미지학』을 주 텍스트로 하는 세미나이다. 벤야민 세미나는 하면 할수록 이 철학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철학과는 거리가 먼 영화 덕후로서 벤야민은 그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논문에서 아우라의 붕괴를 주장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이는 조족지혈이었다. 아직도 계속 배워가는 중이라 얕은 지식으로 함부로 아는 체할 마음은 없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종종 올리는 리뷰에 그의 사유를 적용시켜보도록 하겠다. 어쩌면 다음학차 텀페이터는 벤야민을 이론적 분석 틀로 잡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이미지학』도 개인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할리우드식 장르 문법에만 익숙해 아방가르드를 위시한 예술영화를 볼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편인데 이런 영화들을 볼 때 어떤 식으로 사유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침서 같은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개념이 내 지평을 넓혀주었다. 푼크툼은 간단하게 말하면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푼크툼은 주로 사진에 해당하는 개념이고 이러한 푼크툼을 일으킬 수 있는 영화의 도구는 '몽타주'와 '프레임'이다. 따라서 몽타주로 분절된 서사와 프레임 바깥의 것에 대한 주관적인 사유를 통해 관객은 영화 이미지 사이의 '간격'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화를 환유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항상 내 마음속에선 영화가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생각할 거리도 던져줘야 한다는 좋은 영화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 이것을 말로 설명하려고 하다 보면 다소 1차원적인 표현에 그치게 되어 난감했는데 이론적으로 풀어서 설명할 방법을 푼크툼에서 찾아낸 것이다. 완전히 반-서사적이지 않으면서도 간격에 대해 사유하고 몰입과 거리두기라는 이중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관객 스스로 의미를 만들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가능한 영화가 있고, 그저 마취효과로 연속된 서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 구체적인 텍스트 분석은 관련된 영화를 관람한 후 적용시킬 수 있을 때 해보도록 하겠다.
사실 저 두 세미나를 제대로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인간인 만큼 주말엔 조금 쉰다고 가정했을 때 평일 내내 세미나 준비를 하며 보낼 수도 있다. 방학 때도 조교 일은 쉬지 않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은 항상 부족하다. 발제라도 겹치면 잘 시간도 줄이고 세미나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처럼 내 욕심도 끝이 없다. 딱딱한 철학서적을 많이 읽는 요즘 좀 더 부드러운 사유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소설, 인문학 서적을 읽는 독서모임을 하나 하기로 했다. 덕분에 읽고 싶었지만 차마 시작하지 못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도 어느새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있다. 더불어 정신분석학도 심도 있게 공부해보고 싶어서 인터넷 강의를 하나 수강했다. 다만 벤야민 세미나 발제 준비로 시간을 내기 어려워 잠시 일시정지시켜둔 상태다. 아마 8월 말 내지 9월 초부터는 일주일에 1~2일 정도를 투자해 주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게 될 거 같다. 여기에 이제 살기 위해서 약간의 운동도 정기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하루에 30분 정도라도 운동에 투자해보려 한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나 빼고 읽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는 하다만) '어떻게 저 모든 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품으실 수도 있을 것 같다. 경험상 해보니까 된다. 자는 시간 줄이고, 먹거나 이동하는 시간에 책을 읽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조교 일 할 때도 바쁘지 않으면 무조건 책만 읽는다. 인터넷 서핑이나 유튜브 시청은 내 시간을 죽이는 일이다. 놀고 싶으면 내가 공부하고 분석할 영화를 보면 된다. 연구자의 길을 선택한 이상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게 맞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이렇게 사는 게 재밌고 행복하다. 가끔 있는 약속들이 상당히 귀찮고 그 시간에 공부하거나 영화 보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내서 친구들을 만난다. 그리고 막상 만나면 누구보다 재밌게 놀고 이야기 많이 한다.
이번 방학에도 숨통을 터주는 여행이 딱 한 번 존재한다. 가장 오래되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짧은 부산 여행이다. 이 시간만큼은 세미나, 대학원 생활을 비롯한 나의 모든 공부 계획을 다 내려놓고 철저하게 즐기고 놀다 올 생각이다. 여행 자체가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는 컨셉이라 아마 살이 더 찔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마저도 생각 안 하고 즐기다 오려고 한다. 이런 시간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에너지가 되어줄 거라 믿는다. 다음에 에세이를 쓸 때는 내가 또 어떤 과정을 거치며 성장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