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푸른 선>은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에롤 모리스’가 1988년에 선보인 작품이다. 영화는 1976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일어난 경관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랜달 애덤스’라는 다른 지역 출신의 남자가 억울하게 몰린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랜달 애덤스와 진범으로 추정되는 ‘데이비드 해리스’ 뿐 아니라 사건에 연관된 변호사, 검사, 목격자(증인) 등의 인터뷰를 엮어서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인터뷰의 내용을 관객이 시각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고전 영화와 같은 푸티지 자료를 삽입하기도 하고 인터뷰 내용과 관련된 재연 영상을 촬영해 삽입하기도 했다. 요즘은 TV에서 종종 해주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나 탐사 보도프로그램에서도 이와 같은 극적인 방식을 사용하기에 결코 낯선 형식은 아니다. 하지만 <가늘고 푸른 선>이 나온 게 40년 전인 걸 감안하면 당시의 이런 극적인 형식은 꽤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것 같다.
영화는 인터뷰와 재연 영상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구성이다. 특히 경관이 살해당하는 상황의 재연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이 재연은 목격자나 변호사, 검사의 진술 그리고 그들의 기억에 따라 매번 바뀐 형식으로 재연된다. 예를 들면 재연 영상 처음엔 경관 한 명이 차에 다가갈 때 조수석의 여경이 내려 총을 겨누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경찰 내사를 통해 사실 여경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는 진술이 나오자, 다음 재연 상황에서는 차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던 여경이 총소리를 듣고 후다닥 밖으로 나와 총을 겨누는 모습으로 바뀐다. 또한, 범인의 차량에 탄 사람이 몇 명이고 그의 인상착의가 어떠했는지에 관한 진술이 나올 때마다 범인 차량의 인원도 그리고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인상착의도 매번 변화한 채로 재연된다. 범인이 타고 있던 차의 색상, 기종이 목격자의 진술을 통해 달라지면 다음 재연에서는 차가 바뀌어 있기도 하다. 이런 많은 재연 영상들은 관객이 단순히 인터뷰를 듣는데 그치지 않고 시각적으로 정보를 수정해나가며 벌어진 사건의 진실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극적 재연이 곁들여진 영화는 관객들이 사건에 더 몰입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이런 영화 속 재연 영상 중 다큐멘터리 서사의 진행에서 가장 처음 등장한 장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 러닝타임상 4분 4초부터 5분 5초까지의 아주 짧은 장면이다. 이 장면은 누군가의 진술 때문에 수정되지 않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만든 원본 재연 영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재연 영상은 주변 인물들의 진술로 바뀌는 정보를 그때그때 받아들여 변형된다. 첫 번째 재연 영상 장면을 통해영화 속에서 극적 재연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초점을 맞춰 살펴보려고 한다.
#0 데이비드와 랜달의 인터뷰
사진 1, 2
경관 살해에 대한 첫 재연 영상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진 1, 사진 2와 같은 단독 숏의 형태로 인물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둘은 각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둘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나게 됐는지 회상하고 있다. 랜달은 토요일 아침에 일하러 나갔다가 어떻게 데이비드를 만나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운명이 아니었겠느냐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숏이 사건의 첫 재연 영상이다. 둘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인터뷰에서 본질적인 사건으로 훌쩍 점프했다. 따라서 이야기의 연속성 측면에서도 그렇고 재연 영상에서 나레이션도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어지는 재연 영상이 누구의 시점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첫 번째 재연 영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1 범인의 차를 정차시킨 경관 (지속시간 29s)
사진 3, 4
컷이 전환되고 경찰차와 범인의 차가 외곽에 정차된 모습이 나온다(사진 3). 이 숏에선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음악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필립 글래스’의 음악과 반대 차선을 지나가는 차 소리를 제외하곤 적막하다. 음악은 단조롭고 반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멜로디가 주는 느낌이 구슬프고 쓸쓸해 곧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어서 컷이 전환되고 백미러로 뒤에 경찰이 있음을 확인하는 범인의 어두운 손 실루엣이 등장한다. 그리고 다시 컷이 전환되고 경관이 정차된 차에서 내려 걸어온다(사진 4). 마찬가지로 음악과 차 문을 여는 소리,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만 들린다.
사진 5, 6
다시 컷 전환이 되고 여전히 경관이 걸어오는 또각또각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핸들을 잡고 있던 범인의 손이 스르륵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사진 5). 핸들을 잡고 있어야 할 손이 내려간다는 건 사건이 발생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영상에 나오진 않지만 내려간 범인의 손은 옆에 있는 총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컷이 전환되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경이 차에서 내린다(사진 6). 여경의 손에는 손전등이 들려있다. 인상적인 점은 재연 영상 속 인물들이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경관 살해 사건 재연 영상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관객에게 추가 정보가 될 수 있는 대사는 최대한 배제하고 상황에만 집중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 범인의 차에 다가가는 경관(11s)
사진 7, 8
이어서 컷이 전환되고 범인의 차에 다가서는 경관의 모습이 프레임에 나타난다. 이때 경관이 프레임에 나타나는 방식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먼저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뒤이어 경관의 모습이 등장한다(사진 7). 그리고 경관의 상반신이 나올 때쯤 컷이 전환되어 아래에서 차바퀴를 비추는 숏이 등장한다(사진 8). 그리고 비어있는 왼쪽 여백에서 오른쪽 여백으로 걸어가는 경관의 발의 움직임이 나온다. 이는 완벽히 극적인 문법이다. 마치 스릴러 영화가 긴장감을 고조하기 위해 걸어가는 경관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분할해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다큐멘터리에서 재연을 활용한다는 거부터 신선한 형식인데 더 나아가 이 재연 영상은 단순 사실 나열, 기록이 아닌 상업영화처럼 극적 재연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필립 글래스의 음악이 논-다이제틱(Non-Diegetic)으로 깔리는 것도 극적 재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3 총을 쏘는 범인과 총에 맞은 경관(10s)
사진 9, 10
컷이 전환되고 총이 등장하고 ‘탕’하는 총소리가 연달아 들린다(사진 9). 이 행위는 전환된 지 1초쯤 되는 짧은 시간에 벌어진다. 범인의 전체적인 윤곽은 보이지 않고 총을 들고 있는 손만 프레임에 나온다. 이어서 종이에 그린 경관의 손 모양이 나온다(사진 10). 쏘는 범인이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맞는 경관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손 모양 그림에서 새끼손가락에 처진 동그라미와 In이라는 글씨를 통해 범인의 첫발이 경관의 손가락에 관통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1, 12
이어서 총을 쏘는 손을 다른 각도에서 잡아주고(사진 11), 다시 어디에 맞았는지 알려주는 그림이 등장한다(사진 12). In은 관통을 Bullet은 총알이 박혀있음을 의미한다는 걸 정황상 알 수 있다. 총을 격발 하는 장면은 총 5번이 나오고 종이 그림은 총 4번이 나온다. 이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여덟 번의 컷 전환은 5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다. 마지막 그림이 나온 후에는 다시 사진 11과 비슷한 구도로 전환된다. 이때 총을 겨누고 있던 손을 차 안으로 거두는 움직임이 발생한다.
사진 13, 14
컷이 전환되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범인의 발을 보여준다(사진 13). 영화에서는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최대한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제외하고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보니 범인은 손과 발 등의 분절된 신체나 어두운 형태의 실루엣으로만 등장한다. 컷이 전환되고 바닥에 경관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모습이 나온다(사진 14). 그리고 그의 뒤에 있던 차가 스르륵 이동하는 움직임이 잡힌다. 범인과 달리 경관은 비교적 전신의 모습이 나오며 그가 어떻게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는지 숨기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4 도주하는 범인에게 총을 쏘는 여경(11s)
사진 15, 16
컷이 전환되고 여경이 프레임 중앙에 와서 도주하는 범인에게 총을 쏜다(사진 15). 그리고 도주하는 범인의 차 뒷모습을 보여준다. 범인이나 차가 총에 맞았는지는 재연 영상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시 컷 전환이 되면 경찰차 사이렌의 붉은 조명 앞에서 여경이 총을 겨누는 모습을 사선 각도로 보여준다(사진 16). 그리고 범인이 총을 거뒀던 것처럼 여경도 총을 거두며 재연 영상은 끝이 난다. 경찰차 정중앙으로 달려와 총을 쏘는 것이나, 붉은 사이렌 조명 앞에서 총을 거두는 사선 각도 역시 극적 재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여경을 특정 지을 수 있는 단서는 최대한 가린 채, 행위에 집중하도록 화면을 구성했다. 더불어 사건 당시의 분위기가 잘 살아나게 조명이나 카메라 각도 또한 극적으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