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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Nov 24. 2022

희망으로 오해하지 않게 하는 장치

Wendy And Lucy, 2008 - 켈리 라이카트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웬디와 루시>는 얹혀살던 언니와 형부의 집이 있는 인디애나주에서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주로 이동 중인 ‘웬디(미셸 윌리엄스)’의 이야기이다. 가던 중 자동차도 고장이 나고 돈도 떨어져 가자 웬디는 한 슈퍼마켓에서 물품을 훔치려 한다. 자신의 유일한 동반자인 개, ‘루시’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웬디의 도둑질은 금방 발각이 나고 원칙을 지킨 슈퍼마켓 직원에 의해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경찰서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한 웬디가 나왔을 땐 슈퍼마켓 앞에 묶어 둔 루시는 이미 사라진 뒤 오래였다. 웬디의 여정은 이제 잃어버린 자신의 동반자 루시를 찾는 일이 된다.


 <웬디와 루시>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금융위기를 맞은 2008년에 개봉한 영화다. 영화가 제작 중인 1년 전쯤에도 이미 미국 경제는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업자와 노숙자들은 넘쳐 났다. 영화의 주인공 웬디도 같은 부류의 하층민을 대변하고 있다. 영화에서 자세한 사정은 등장하지 않지만, 언니와의 통화를 통해 자신의 집을 보유하고 있는 언니 가정도 현재 형편이 어려우며 자신의 동생이 길거리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도와줄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게 드러난다. 그리고 언니 말의 뉘앙스를 보면 그녀가 그래도 몇 번 웬디를 도와줬었는데 이제는 더는 도와줄 수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웬디가 알래스카로 향하는 것도 다른 곳은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오히려 외떨어진 알래스카는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라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웬디는 자의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카푸어 족처럼 생활하고 자동차마저 고장이 났을 땐 길거리 노숙자와 다를 것 없는 신세가 된다. 영화는 이런 웬디의 삶을 관조하듯 보여주고 있다. 희망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불행을 나열하듯 그려내지도 않는다. 시의적절한 초상을 그저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영화상에서는 희망을 읽을 수 있는 장치가 특별히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희망이 느껴진다면 이는 영화에서 메시지를 심어준 것이 아니라 그저 영화를 본 관객이 인지상 웬디가 알래스카로 가서는 행복할 것이고 루시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바라는 것이다.     


 <웬디와 루시>에는 관객이 감동할 수 있는 장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을 일종의 희망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영화에선 은근히 암시를 주고 있다. 해당 장면 중 하나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영화 러닝타임상 1시간 1분 35초부터 1시간 4분 22초까지 2분 47초간 진행되는 짧은 장면이다. 웬디가 루시를 찾는 데 큰 도움을 준 경비원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자동차가 수리 중이라 지낼 곳이 없어진 웬디는 어느 언덕에서 사람이 잘만한 흔적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눈을 붙인다. 한참 자고 있던 야밤에 늙은 참전 용사 아저씨가 나타나 웬디의 가방을 뒤지기도 하고 깨어난 웬디 옆에서 한풀이하다 사라진다. 공포를 느낀 웬디는 그 길로 일어나 도망쳐 경비원이 일하는 건물 앞으로 가서 밤을 꼴딱 새우며 경비원을 기다린다.     


#1 경비원을 기다리는 웬디 (지속시간 22s)     

사진 1, 2 (순서대로)

 컷이 전환되고 앉아서 경비원을 기다리고 있는 웬디의 모습이 보인다(사진 1). 도망치듯 이곳에 왔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는 데 어느덧 해가 쨍쨍한 낮이 되어있다. 밤을 새웠지만, 졸리거나 힘든 기색은 딱히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경비원이 와서 잃어버린 루시의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듯 보인다. 이어서 컷이 전환되고 뒷부분이 찌그러진 자동차 한 대가 들어온다. 서둘러 짐을 챙겨 일어나는 웬디의 모습을 통해 이 자동차가 경비원의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사진 2).         


#2 홀리의 첫 등장 (17s)    

사진 3, 4

 웬디가 사진 2처럼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 컷이 전환된다. 프레임 오른쪽에 웬디의 뒷모습을 걸고 프레임 왼쪽에서 중앙을 향해 경비원이 서서히 걸어온다(사진 3). 이때 경비원은 차 앞을 돌아 웬디에게 오는 게 아니라 뒤로 돌아오고 그러면서 프레임 중앙에 놓인 자동차 뒷부분의 찌그러짐이 선명하게 노출된다. 사고라도 난 듯 크게 찌그러져 있고 이를 영화가 의도적으로 노출했다. 이를 통해 웬디를 도와주던 경비원 역시 찌그러진 차를 수리하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그간 동화 속 백마 탄 왕자와 같은 구원이 아니라 조금 더 나은 형편이 조금 더 어려운 형편을 도와주었던 모양새다. 대화를 통해 오늘은 경비원이 쉬는 날이며 그가 지금 홀리의 아들을 등교시켜 주고 왔음이 관객에게 밝혀진다. 그리고 차에 탄 제3의 인물 ‘홀리’가 처음 등장한다(사진 4). 홀리의 등장과 단독 숏은 다소 뜬금없다. 영화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도 없고 서사상 그다지 중요한 캐릭터가 아님에도 영화는 홀리의 얼굴을 단독 숏으로 비춰준다. 홀리와 경비원의 관계는 영화에서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 대신 경비원이 그냥 아들도 아닌 홀리의 아들이라고 콕 집어 언급한 것으로 보아 홀리는 그의 연인이거나 재혼한 부인일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어떤 관계이든 전통적인 가족은 아니고 삶이 녹록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홀리의 단독 숏의 의미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홀리는 경비원의 조건 없는 호의가 자신들의 형편을 넘어서지 않도록 억제해주는 감시자의 역할이다. 별다른 말이나 행동을 취하진 않지만, 차 안에 있다는 존재감 하나만으로 웬디와 경비원 사이엔 분명한 경계선이 생긴다. 경비원도 홀리가 기다리고 있어서 마냥 웬디를 도와줄 수 없고 웬디 역시 괜히 홀리의 눈치를 보게 된다. 중간의 삽입된 단독 숏을 통해 이런 느낌을 영화를 보는 관객도 받게 되는 효과가 있다.   

  

#3 보호소와 통화하는 웬디 (59s)             

사진 5, 6
사진 7

 경비원은 보호소에서 연락이 왔다며 자신의 휴대폰을 건넨다(사진 5). 웬디는 휴대폰도 없어서 매번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둘 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경비원이 좀 더 나은 형편임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이어서 웬디의 단독 숏이 나온다. 그녀는 휴대폰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귀에 가져가 댄다. 그리고 다음 숏은 다시 홀리의 단독 숏이다(사진 6). 짧게 나온 이 숏에서 홀리는 웬디와 경비원 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자신의 입술과 앞머리를 괜히 만지작거릴 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시자로서의 그녀의 태도는 확실히 나타난다. 적극적으로 웬디의 일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차 안에서 자기 일을 하고 관심 없는 태도지만, 웬디의 처지에선 신경이 아예 안 쓰일 수 없다. 홀리는 서사 진행에서 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두 번의 단독 숏으로 등장하며 감시자 역할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낸다. 그리고 다시 전화하는 웬디의 모습으로 컷 전환된다(사진 7). 영화에서 보기 드문 웬디의 미소가 드러난다. 루시를 찾은 것이다.    

사진 8, 9

 이어서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경비원의 단독 숏이 나온다(사진 8). 사람 좋은 그의 캐릭터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사진 7의 프레임 오른쪽 아래를 보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무료해하는 듯한 홀리의 모습이 보인다. 웬디와 경비원 쪽을 바라보고 있진 않지만, 차 안에 앉아 있는 감시자 홀리의 모습은 루시를 찾은 감동하고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어쩌면 다소 냉정함은 있지만, 자기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을 대할 때 나타나는 객관적인 속마음을 홀리가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어서 컨 전환이 되고 웬디의 단독 숏이 나온다. 그녀는 루시의 현 위치를 듣고 있다. 경비원은 이런 웬디에게 자신의 펜도 빌려준다. 다시 컷이 전환되고 투 숏이 나온다(사진 9). 펜뿐 아니라 적을 노트나 종이 쪼가리 하나 없는 웬디는 자신의 팔에 루시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장면에선 홀리의 모습을 경비원이 가리고 있어서 잠시나마 감시자로부터 숨을 돌릴 수 있다.     


#4 웬디에게 소량의 돈을 건네는 경비원 (69s)    

사진 10, 11

 통화를 마친 웬디와 경비원이 대화를 나눈다. 이때 숏은 사진 7과 같은 웬디 단독에서 홀리가 프레임 아래 잡힌 사진 8로 넘어갔다가 다시 사진 7의 단독 숏으로 넘어온다. 둘의 대화를 통해 웬디가 루시를 찾았고 찾으러 갈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컷이 투 숏으로 전환된다(사진 10).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던 경비원이 홀리의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웬디에게 돈을 건넨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웬디 쪽으로 이동하고 홀리가 보지 않게 몰래 돈을 받으라고 말한다. 경비원이 웬디 쪽으로 다가서며 웬디가 돈을 받을 때 홀리는 프레임 상에서 완전히 가려진다. 감시자의 눈을 피해 자신의 호의를 전달한 것이다. 감사하게 받는 웬디의 단독 숏이 이어지고 이어서 사진 3과 같은 모습에서 이제는 반대로 차로 향하는 경비원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컷 전환이 되며 웬디의 손에 든 돈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웬디가 액수를 확인하는데 1달러 지폐 한 장과 5달러 지폐 한 장이 손에 들려있다. 경비원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6달러라는 돈은 지금 웬디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장 차 수리에만 2000달러가 들어 차를 포기했고 알래스카에 가는 경비에도 어떤 극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액수다. 당장 어제 웬디가 도둑질로 경찰서에 잡힌 후 냈던 벌금만 해도 50달러다. 영화는 굳이 경비원이 돈을 건네는 장면을 넣고 얼마를 줬는지 그 액수마저도 관객이 잔인하게 확인하도록 만든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형편이지만, 웬디를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줬고 적은 액수라도 돈까지 쥐여준 경비원의 모습은 분명 감동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아직 세상은 따뜻하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또한 이 장면을 낙관적인 희망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감시자였던 홀리와 돈의 클로즈업을 통해 냉혹한 현실을 관조하듯 담아내고 혹시나 감동으로 낙관적인 희망에 빠진 관객이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이렇게 영화는 관객이 희망을 읽어내기보단 현실을 일깨울 수 있는 장치들을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하나의 관객으로서 인지상 웬디가 알래스카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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