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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리썬 윤정샘 Jul 08. 2021

싱그럽게 반짝이는 나의 여름

나는 왜 여름날의 밤공기에 매료되는가

 “오늘도 늦게 들어오는 건 아니제?”

 “아이고 엄마 지금이 오후 2시다. 이렇게 일찍 나가는데 뭐 얼마나 오래 있겠노. 저녁 먹고 늦어도 10시 전에는 올게.”


  그를 세 번째 만나는 날. 지난 데이트 때 밤 12시가 다 되어 귀가했던 나는 엄마의 따가운 눈총을 애써 외면하며, 이번에야말로 늦지 않으리라 호언장담을 하고 집을 나섰다. 전신 거울에 비친 발랄한 단발머리와 푸른빛 원피스가 유난히 예뻐 보인다. 6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 얼굴 위로 강렬하게 내리쬐자 심장도 덩달아 경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180센티미터의 키에 비율 좋은 몸매를 자랑하며 세미 정장을 차려입은 그가 서 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단정한 모습이 세련미를 더해준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평소 말이 그리 많지 않고 감정 표현에 능숙하지 않은 그는 술을 한 잔 기울이자 유독 말이 많아졌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의 이야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야외 테이블 위로 간간이 지나는 바람이 무척이나 상큼했다. 오후 2시에 만났는데 어느덧 밤 10시다. 


  “어머! 벌써 10시네요.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갈려고요? 자리 옮겨서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요. 딱 한 잔만. 12시 전에는 보내줄게.” 


  계절이 문제인가 장소가 문제인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초여름 날의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이미 그 시간과 공간과 사람에 취해버린 나는 이성을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야외 테이블 위로 청하 4병이 더해졌다. 새벽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더 이상 늦어서는 안 되겠다며 일어선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었다. 집까지 걸어가는 길, 기분 좋게 비틀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머리에 뿔을 달고 기다릴 엄마에 대한 걱정마저도 상큼한 밤바람이 살포시 날려버린 듯했다.   



 

  함께 비틀거리며 걷던 그와는 이듬해 결혼을 해서 아들 셋을 낳았다. 이건 순전히 그 여름날의 야외 테이블 탓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밤이 되어도 왠지 모르게 덜 깜깜한 것 같고, 옷을 더 껴입을 필요도 없고, 어깨를 움츠리지 않아도 되며, 파릇파릇 초록 잎사귀만큼이나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런 여름날의 밤공기를,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한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겨울은 꼭 판화의 음각처럼 움푹 들어가 그림자가 드리운 느낌이라면, 여름은 양각처럼 볼록 튀어나와 따듯한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 그 느낌이 나를 참 설레게 한다. 그리고 그 설렘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 때문인가. 나를 일으켜주는 소중한 추억들 또한 여름날의 장면들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쩐지 봄, 가을, 겨울날의 추억들은 미농지를 덧댄 듯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데, 여름날의 추억들은 유약을 발라놓은 듯 색이 바래지 않고 더욱 선명하게 광택이 나니 말이다. 굵은 땀방울 뚝뚝 흘리며 베트남의 어느 한 학교에서 벽화를 그리고 사물놀이 공연을 했던 순간의 희열, 선크림 잔뜩 바르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27일 동안 걷고 또 걸었던 국토대장정의 뜨거운 열정, 핫팬츠 입고 누비던 밤바다의 파도 소리, 슬리퍼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던 모래 알갱이, 그것을 씻어 내리던 차디 차가운 물, 스노클링 하며 내려다본 바닷속 풍경, 온 가족 함께 산책하는 길 어서 오라며 손짓하는 세 살 아가의 짧고 보송보송한 팔뚝, 그렇게 떠오르는 생생한 장면들 속에서 나는 진정 살아있음을 느낀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어느새 초록 잎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식구들 모두 곤히 자는 이른 아침, 홀로 눈을 떠 거실 창밖으로 넘실대는 잎들을 바라보는 순간이 참 좋다. 나의 하루도, 나의 생도 그렇게 싱싱하게 살아 숨 쉬며 춤을 추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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