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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리썬 윤정샘 Apr 20. 2020

텅 빈 운동장,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세상을 그리며


소리 질러야 아이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어야 아이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동네를 뛰어다녀야 그게 아이다.

더 나아가 구르고, 뒹굴고, 물어뜯고,

때로 비명도 지르며 한 시절을 보내야

아이다운 아이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땅바닥을 박박 기고

굴러다니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시끄럽다고

소리도 못 지르게 하고,

뛰지도 못하게 하고,

울지도 못하게 하고,

뛰어내리거나 구르지도 못하게 한다.      


-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다 밥이다’ 중에서 - 



몇 년 전 편해문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구구절절 가슴이 너무 아파 혼났던 기억이 난다. 뛰지 못하고 소리 지르지 못하고 울지 못하며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아이들. 어려서부터 공동주택에 살며 뛰지 못하고, 어린이집에 가서는 세상의 규칙에 적응해가며 더더욱 뛰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닭장 같은 곳에서 다닥다닥 붙어 앉아 “뛰지 마라. 조용히 해라.”를 쉴 새 없이 들으며 자라나야 하는 가여운 아이들.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마음껏 놀지 못하는 아이들이 정말 안타깝게 느껴졌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그 안타까움은 더더욱 커진다. 내가 우리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걸 최대한 늦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너무 일찍 호기심을 내려놓고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조금이라도 어릴 때, 그나마 엄마 품 안에 있을 때, 이것저것 만져보고 싶은 것 다 만져보라고, 뛰고 싶을 때 마음껏 뛰어다니라고, 마음껏 구르고 뒹굴고 하라고.



첫째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저지레가 심했다. 둘째와 셋째의 어린 시절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될 만큼. 둘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집은 쑥대밭이었고, 음식은 먹는 대상이 아니라 탐색 대상에 가까웠다. 문화센터에는 갈 필요도 없이 그냥 집 자체가 오감체험 현장이었다. 서랍장 하나 남아나는 것 없이 죄다 열어 살펴보기를 좋아했고, 그중에 top은 싱크대였으니. 온갖 조리기구들을 장난감 삼아 노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도무지 견디지 못할 그런 유형의 아이. 내가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탐색 욕구 강한 아이를 허용해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으니, 어린이집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어떠한 제한과 통제 없이 그저 물 흐르듯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 놀고 또 놀았다.



아이는 모래놀이도 굉장히 즐겨했는데, 모래놀이터에 놀러 나가 놀 때면 신발을 벗고 놀거나 온몸에 모래투성이가 되도록 놀곤 했다. 나는 그런 것이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웬만하면 모두 허용해주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놀겠니, 그냥 씻으면 되지 뭐 하는 생각으로. 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 바로 옆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의 모래놀이터와 미끄럼틀이 우리의 주요 아지트였다. 틈만 나면 그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며 우리들만의 추억을 하나둘 쌓아갔다.



첫째가 27개월쯤 되었을 때였던가. 가을의 초입, 신선한 바람과 따듯한 햇살이 어우러져 바깥놀이 하기에 참 좋았던 어느 날 첫째가 학교에서 놀고 싶다고 했다. 그럴 때면 대부분 오케이! 하며 집을 나서는 편이다.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지 않았기에, 자유롭고 여유롭게 아이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그런 하루하루가 참 좋았다.



아기띠에 안겨있던 둘째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도착한 학교, 역시나 아무도 없다. 첫째가 “형아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다. 지난번 학교에서 처음 보는 형아랑 누나랑 모래 놀이도 하고 잡기 놀이도 했던 게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았나 보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기에 그날도 몇 명이나마 놀고 있기를 기대하며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아이는 학교 모래사장이 마냥 좋은지 어디선가 노란 플라스틱 그릇을 하나 주워와서는 차곡차곡 모래를 담았다가 쏟았다가 한참을 그렇게 놀았다. 그러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서 불편하다며 신발을 벗어 옆에 두고는 철퍼덕 주저앉아 또 한참을 논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혼자서 저렇게 모래를 담았다가 부었다가 하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을까. 역시나 어른과는 다른 아이들만의 세상. 그 순수한 세상이 참으로 경이로워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었다.



아이는 모래 놀이를 하다가 맨발로 학교 곳곳을 뛰어다니기도 하며, 그늘이 학교 운동장을 점점 덮어가도록 두 시간 남짓 그렇게 놀았다. 구름사다리를 오르내리다가 앞으로 꼬꾸라져 한바탕 울기도 했는데, “집에 가서 밴드 붙일까? 더 놀까?” 하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더 놀아.” 하는 아이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한참을 뛰어놀 동안 학교 운동장에 놀러 오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어릴 적 학교 운동장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노는 아이들로 가득한 정겨운 곳이었는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얼음땡 놀이, 말뚝박기와 같은 놀이들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었는데. 8년 전 시골 학교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저녁 무렵 학교 운동장에 걷기 운동을 하러 가면, 학교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함께 잡기 놀이도 하고 경찰과 도둑 놀이도 하며 잊지 못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곤 했었는데. 왜 전교생이 천 명이 넘는 이 학교의 운동장은 이렇게 날마다 텅텅 비어있는 것일까.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학원에 보내지 않고 맘껏 놀게 허락해줄 생각인데 문제는 노는 아이들이 없다는 것, 함께 놀 친구들이 없다는 것이다. 맘껏 놀기의 황금 시기인 초등학생들이 놀 시간과 공간도 없이, 무거운 가방 들고 이 학원 저 학원 전전하며 스트레스받고 억눌려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건 과연 나뿐일까. 날마다 텅 비어있는 운동장을 보며 한없이 안타까워지는 것을 넘어 슬프기까지 한 건 비단 나뿐인 걸까.



공동체 육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모래 놀이를 하며 뛰어놀 수 있는 친구가 단 몇 명이라도 있다면, 신발을 벗고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모래놀이터에 엉덩이 깔고 앉아 한참을 놀아도 흐뭇하게 바라볼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나의 마음과 같은 누군가가 딱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이도 나도 외롭지 않게 오래오래 나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 한가득 안고 텅 빈 운동장을 뒤로하며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마음껏 뛰어놀아서 발그레진 얼굴로, 내일 또 학교에 나가 놀자며 마주 웃었다. 내일은 운동장에서 친구를 만나면 참 좋겠다 하며 말이다.           



아이들이 세상에 온 까닭은 뭘까

–편해문


꽃들은 말한다네

웃으러 왔다고     


별들은 말한다네

꿈꾸러 왔다고      


아이들아,

너희가 세상에 온 까닭은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동무들과 뛰놀기 위해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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