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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임문학관 Jan 02. 2020

낮은 자가 높아지리라

게임 이야기 #3. <드래곤 퀘스트 III: 전설 속으로>

1988년에 출시된 <드래곤 퀘스트 III: 전설 속으로> 는 여러모로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를 지금의 인기 프랜차이즈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기념비적인 타이틀이다. 게임 자체의 방대한 스케일, 현재 수많은 RPG 게임에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는 자유 파티와 직업 시스템의 재미를 극대화한 점, 그리고 그 당시 게임에는 찾아보기 힘든 세세한 디테일과 잘 짜인 밸런스 등으로 RPG 장르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이 상징적인 작품은 높은 완성도 외에도 전설의 용사라는 모티프에 어울리는 대서사시급 시나리오도 자랑한다.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나서는 정의로운 용사의 가슴 뛰는 이야기는 출시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경험 하기에도 진부하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가 이 게임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용사와 동행하는 '한 동료'의 모습이었다. 드래곤 퀘스트 III 의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자유 파티와 전직 시스템을 통해 플레이어는 파티에 속한 동료들을 다양한 직업으로 키울 수 있다. 격투가, 전사, 승려 등 여러 직업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데, 그중 특이하게도 ‘놀이꾼’이라는 직업이 있다.


동료를 놀이꾼으로 전직시키면 말 그대로 놀기만 한다. 적을 공격하라고 해도 거드름 피우며 명령을 무시한다. 전투에 참여하는 일이 없으니 당연히 게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직업이다. 당연히 세상을 구해야 하는 용사 입장에서 놀이꾼 따위를 내 파티의 멤버로 둘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놀이꾼이 갖고 있는 비밀이 하나 있다. 캐릭터를 놀이꾼으로 전직시키고 레벨 20까지 놀게 내버려 두면,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에서 가장 강력한 직업 중 하나인 ‘현자’로 전직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놀기만 하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어느새 ‘현자’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로 전해 내려 오는 이 게임 속 일화는, 제작자 호리이 유지의 장난이라고 볼 수도 있고, 어쩌면 그가 갖고 있는 인생의 철학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내가 드래곤 퀘스트 III 를 처음 했을 땐 이 사실을 모른 채 놀이꾼이라는 캐릭터의 컨셉이 마냥 재미있어서 키웠는데, 어린 맘에 동생을 놀린답시고 놀이꾼의 이름을 동생의 이름으로 설정했었다. 놀이꾼에게 무엇을 시키면 동생의 이름을 달고 게으름 부리는 모습이 웃겼었다. 커맨드를 입력하면 놀이꾼인 내 동생은 전투 중에 잠을 자거나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어쩔 땐 스스로 대미지를 입히는 정말 답답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파티에 넣고 다니며 레벨을 올려줬었다. 어쨌든 동료니까. 그러다 나중에 놀이꾼으로 놀기만 하던 내 동생만이 현자가 될 수 있었고, 최강의 캐릭터가 되어 내 파티를 승리로 이끌어 주었다.


가장 낮은 자가 높아지는 이 모습은 당시 내게 굉장한 인상을 남겼다. 한량 같은 백수가 놀다가 갑자기 성공하는 그런 모습으로 보이기보다는, 모두가 무시하고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자가 자신만의 길을 걷다가 비상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대게 게임의 주인공은 용사의 혈통을 타고난 전설의 인물이라던지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세계를 구하는 용사는 어부의 아들이기도 하고, 심지어 떳떳지 못한 과거를 가진 자이기도 하다. 시작점이 비록 놀이꾼이라 하더라도, 현자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꾸준히 파티에 참여하여 경험치를 쌓으며 레벨을 올리는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 올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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