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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임문학관 Dec 29. 2019

게임을 캔버스 삼고

게임 이야기 #2. <우주 장례식>

어서 떠나거라.


아버지가 건넨 이 냉정한 한마디로 게임은 느닷없이 시작된다. 주인공은 시종일관 눈물을 흘리는 줄무늬 잠옷 소년 필립(Philip). 방 한구석에는 허름한 나무 관짝이 놓여있고, 어째서인지 또 다른 내가 시체가 되어 잠들어 있다. 집 밖을 나서면 어릴 적 한두 번은 필연적으로 보았을 법한 악몽의 세계가 펼쳐지고, 배경에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몽환적인 멜로디가 가슴을 싸늘하게 한다. 그리고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당장 떠나라는 부모님의 가슴 시린 말만 듣고 주인공은 마을 밖으로 나선다.


모든 캐릭터와 배경 스프라이트는 무려 그림판으로 자체 제작되었다


게임의 목적은 불분명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의미심장하지만 전혀 종잡을 수 없는 몇 마디만 해주고, 그 몇 마디 속에서 갈피를 잡아야 한다. "피의 동굴에는 피가 아주 많아"라는 말만 듣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피의 동굴이라는 곳을 목적지로 정한다. 여행길에 인간의 다리로만 이루어진 기괴한 생명체 다리말(Leg Horse)이라는 동료를 얻고, 주인공 필립은 이 알 수 없는 <우주 장례식>의 세계를 탐험하게 된다.


기상천외한 적들과 익살스러울 정도로 괴상한 전투 컨텐츠는 <마더>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우주 장례식은 인디게임 제작자 thecatamites가 2010년에 RPG Maker 2003으로 만든 게임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인디 게임 웹사이트에 업로드해버리고, 부연 설명에는 "피가 아주 많다(lots of blood)"라고 할 뿐, 그다지 진지함이 보이진 않는다. 아무리 봐도 그냥 심심해서 (혹은 취해서) 대충 뚝딱 만들어버린 게임 같은데, 직접 해보면 알겠지만 (무료 배포이므로 이곳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게임을 클리어하기까지 걸리는 1시간 남짓 동안 드는 생각은 "나는 지금 한 사람의 예술적 실험에 동참하고 있구나"라는 것이다.


우주 장례식이 공개된 이후에 인디 게임계에는 작은 파동이 일어났다. 전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게임에 생명력이 느껴졌고, 게임이라는 것이 인간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져도 되는 매체였나, 그리고 인간의 예술적인 (혹은 광적인) 표현을 담아낼 수 있는 매체였던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게임은 예술적인 실험이 될 수 있을까? 게임은 아무나 뚝딱 만들 수 없다는 인식이 있다. 지난밤 꿈에서 본 환상의 세계를 아침에 허겁지겁 일어나 캔버스에 마구잡이로 담아내는 예술가의 이미지와 게임 개발자의 이미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째서 게임은 우리가 연습장에 쉽게 끄적이는 낙서나 언제 한 번 날 잡고 써보는 수필이나 소설처럼 쉽고 마음 가는 대로 예술의 혼을 불태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게임 개발의 기술이 프로그래밍 천재들만의 특권이라는 인식은 이미 끝난 지 오래이다. Unity, RPG Maker, Twine 등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툴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언리얼 엔진이 무료로 배포되는 세상이 왔는데, 리소스 부족은 절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게임 또한 그 어느 예술 매체처럼 인간의 상상력과 무모한 예술적 도전을 받아낼 그릇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주 장례식은 그런 이유로 중요한 게임이다. 게임으로도 이런 실험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케이스다. 특별히 뛰어난 개발 실력이 없는 하나의 개인이 게임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밀어내는 예술성을 발휘한 것이다. 바이오웨어(BioWare)의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었던 레베카 하윅(Rebecca Harwick)은 우주 장례식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우주 장례식은 그저 전통 일본 RPG의 틀에서 벗어나는 수준에 그치지 않습니다. 아예 그런 전통의 일거수일투족을 신랄하게 까발리는 정도이죠. 우주 장례식의 끔찍하리만큼 단순한 MS 그림판 픽셀은 말이죠, 화려하지만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이 무미건조한 AAA급 게임의 그래픽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생동감이 넘치는 상상력과 에너지를 게이머에게 전달해줍니다. ... 우주 장례식은 '안전한 게임'이 아니고, '쉬운 게임'도 아닙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임이죠. 그리고 이 게임을 하고 있으면 현재 출시되는 수많은 상업 게임의 부족한 상상력에 실망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 이런 게 예술 아닐까요?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고 생각을 바꾸게 만드는 것."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Gamer (Credit: Tim McDonagh)


우리는 왜 실험을 하는가? 우리는 왜 예술을 하는가와 비슷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답은 무궁무진하다. 문화를 간직하고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본능적인 창조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특정 매체에 어떠한 힘을 불어넣기 위해. 우리가 주위 환경과 소통하는 하나의 과정이기에. 혹은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아'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어찌 되었건, 인간과 예술적인 표현은 떼어놓을 수 없는 상호 관계에 놓여있다. 우리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본능적인 욕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주 장례식은 그러한 인간의 욕구를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유롭게 꽃을 피운 경우라고 본다. 그것도 너무나도 쉽고 간단하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게임이라는 매체가 비단 손익 분기점을 넘겨야 하는 상업적 아이템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누구든 자유롭게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게임이 가진 예술적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게임이라는 캔버스를 통해 예술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이미 게임 개발에 몸을 던진 사람들은 우주 장례식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에 도전을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 실험을 한다는 것은 때론 두렵겠지만, 무엇이든 처음 만들어지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도전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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