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속도
학교를 끝나면 2번째 등교 장소로 간다. 그 이름은 ‘맥도날드’. 내가 캐나다에 살 때 많은 맥도날드에는 키즈존이 있어서 볼풀장과 미끄럼틀과 같은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엄마는 나와 언니에게 해피밀 세트를 시켜주고 테이블에 앉는다. 언니는 신이 나서 볼풀장으로 뛰어들어간다.
그 작은 놀이터에 아이들 하나둘씩 도착한다. 노랑머리, 파랑, 초록눈의 친구들이 도착하면 엄마가 얼른 가서 놀라고 재촉한다. 언니는 벌써 나 잡아봐라 하며 한 마리의 다람쥐처럼 빈틈없이 이리저리 쑤시고 돌아다닌다.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이름도 모르는 친구들과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고는 한다. 와서 말을 걸고 놀이를 하자고 제안하다 보면 한, 두 시간이 바람결에 날아가는 듯하다.
나는 다른 친구들이 볼풀장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서 말 걸라고 재촉하는 엄마가 싫다. 우리는 하교 뒤, 매일 같이 맥도날드에 출근도장을 찍고 다른 친구들을 기다린다. 친구들이 한 명도 오지 않는 날도 있다. 맥도날드는 ‘무료 스피킹 교습소’인데 아무도 안 오면 낭패다(교습비 : 해피 밀값). 오늘도 안 온다며 투덜투덜거리다 누군가 들어오면 언니의 반짝거리는 눈에는 설렘 한 스푼, 장난기 한 스푼이 눈동자에 담가져 있다.
나는 마지못해 볼풀장에 들어가 놀다가 이내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남아 있는 음식을 먹는다. 언니는 배 고픈 줄 모르고 노는 것 같다. 열심히 뭐라도 먹고 있으면 엄마가 가라고 안 한다. 그런 나는 2개의 세트의 감자튀김을 몽땅 먹어 치우고는 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기 전까지 우리의 이러한 루틴은 반복되었다. 한국에서 떠난 깡마른 소녀는 소아비만에 가까운 통통한 소녀로 바뀌어있었다. (맥도날드, 미워!!)
엄마는 분명, 언니와 같은 기질의 소녀였을 것 같다. 대게 양육할 때 같은 기질의 자녀는 공감도 가고 이해도 많이 돼서 키우기 수월하다던데 아마 나는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항상 수수께끼 같은 어려운 딸이었다. 엄마는 나를 답답해했다. 아이들은 놀이터를 좋아해야 하고 친구를 좋아하는 게 맞는데 이러는 나를 잘 이해 못 한다. 물론 나도 놀이터도 좋아하고 친구도 무진장 좋아한다. 얼마 전 만난 친한 친구와는 5시간을 수다 떨고도 못한 말이 많아 아쉬워했다. 매번 달라지는 낯선 얼굴의 새로운 친구들이란 자극이 나에게는 버거울 뿐이다. 내 페이스대로 자연스럽게 누군가 가까워지고 친숙해질뿐이다.
이제 만 4살이 된 아이와 지난여름에 제주도에서 유난히 바다수영을 많이 했다. 튜브를 끼우고 파도와 장난을 치며 바다와 친해지는 노력을 해도 아이는 거부감을 보낸다. 내가 안지 않으면 아이는 큰소리로 울며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하루 이틀은 적응하느라 그러겠지 하고 이해했는데 지속적으로 엄마를 찾고 내 몸에 다리를 붙들고 있는 아이가 이내 답답해진다. 아이들이 튜브 끼고 헤엄쳐서 몇 미터 떨어져 있는 엄마에게 헤엄쳐 가는 모습을 보며 할 수 있다 말해줘도 두렵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조카는 헤엄을 잘 쳐 자유롭게 놀고 있는 언니가 부러울 뿐이다. (난 아들이 다리로 내 몸을 휘감아 수영 한번 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생각한다. 맞다. 나는 모래가 내 발바닥에 닫기만 해도 까무러치게 큰 소리로 울던 아이가 아니던가. 화장실에 혹시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밟기라도 할까 봐 까치발 들고 촉각을 곤두세우던 아이 었다. 그런 내가 낳은 자식이니 내가 이해를 안 한다면 누가 하리. (꼭 남편 닮았으면 하는 부분은 날 닮아 있다.) 그렇게 바다에서 나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아들과 한 몸인 채로 수영을 한 날이 하루 이틀 지나 2달이 되어갈 때 즈음에 아들은 나 홀로 튜브에 몸을 싣고 허우적허우적 팔, 다리를 휘저으며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내가 튜브에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엄마 손 치워! 혼자 할 거야!” 하며 나에게 화를 낸다.
몇 시간 동안 수영을 하고 차에 탄 아들이 나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짐한다. 아이들은 서로 각자의 속도가 있다. 바로 발전하는 게 보이는 아이도 있는 반면 성장이 잠재되어 있다가 편안해질 때 표면 위로 살포시 올라오는 아이도 있다. 마음이 편안하고 환경이 친숙해질 때까지 마음속에 ‘참을 인’ 자 세 번 새기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