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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고 Dec 27. 2021

응답하라 1988

서울 올림픽

    우리가 캐나다에서 살면서 여기의 일상에 하나둘씩 적응해갔다. 근처 생활에 필요한 시설과 가게들, 산책할 공원을 파악해 나갔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한국과 매우 다르다고 느낀  하나는 모르는 사람들끼리 서로 인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슈퍼에서 카트를 끌다가 눈만 마주쳐서 눈웃음을 치며 서로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도 아는 아줌마가 인사를 해도 엄마 치마 뒤로 숨던 나는 그렇게 일상적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게다가  내가 잘 지내는지 묻는 거지..?)


    대답을 잘했다가는 더 불상사가 난다. 날씨를 공유하고 좋은 하루 보내라고 덕담도 한다. 낯선 이의 수많은 호의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게다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는 괜히 말 걸지 말라는 오로라를 내뿜어 기선제압을 시도하지만 역부족이다.


    참 신기하다. 언니는 못하는 영어로도 곧 잘 대답한다. 말도 건다. 기가 찰 노릇이다. 언니는 부담스럽지 않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엄마는 나에게 말한다. “너도 언니처럼 좀 적극적으로 해야 빨리 영어가 늘지. 말도 걸고, 질문도 하고, 안돼도 계속하다 보면 느는 거야. 같이 왔는데 언니는 벌써 조금 영어 하잖아.” 나도 느낀다. 언니는 하루가 다르게 영어가 늘었다. 공원에 놀러 가도 E기질 다분한 언니는 아무에게나 말을 걸며 금방 친해졌다. 그럴 때마다 엄마도 나한테 “빨리 너도 가서 말 걸고 이야기 나누고 같이 놀아”라고 재촉한다. 이 과정이 나한테는 매우 긴장을 동반한다. 언니는 호로록 국수 면을 목구멍에 넘기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지나가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고 현관문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긴장과 공포의 연속이다.


    하루는 엄마, 언니와 함께 스탠리 파크에 간 기억이 있다. 이렇게 큰 공원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롭다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백인 아저씨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가다 멈췄다. (아저씨.. 계속 타고 지나가세요..)

“Hi. How are you? Where are you from?”

엄청나게 큰 눈과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물어본다.

“KOREA!”

언니가 큰소리로 대답한다.

“Oh.. where?”

엄마가 모를 때는 올림픽을 말하라고 했다. 서울 올림픽!

“um…Seoul Olympic!”

내가 용기를 내어 말한다.

“se.. ul?? Is it near India?”

.

.

방송을 보면 예전에는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면 북에서 왔는지 남에서 왔는지 물어봤다는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유일한 이미지가 한국전쟁 혹은 김정일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맨 처음에 캐나다에 갔을 때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과 북을 논하기 전에 존재를 알지 못했다.  정도로 존재감 없는  조그마한 반도에서  나는 괜히 위축되었다. 괜히 위축이 되면 작은 호의도 크나큰 긴장을 유발한다.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마음이 너무나도 움크러져있다. 나를 자꾸 설명하고 설득해야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에 대한 관심은 나의 방어기제를 더욱더 두텁게 견고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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