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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I

2-6. 한국 AI 산업의 비대칭 재편

의료·제조·금융·콘텐츠·국방, 각 산업이 맞닥뜨린 서로 다른 현실

by 유비관우자앙비

AI는 산업마다 다르게 침투합니다.

같은 AI 기술이라도 산업에 따라 작동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데이터 구조, 규제 환경, 자본 흐름, 시장 크기에 따라 AI의 침투 속도와 파괴력, 그리고 승자가 다르게 정해집니다. 최근 몇 달간의 변화는 이 점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단순히 "AI가 산업을 바꾼다"는 수준을 넘어, 각 산업의 내부 작동 원리 자체가 재설계되는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의료 — 글로벌 경쟁력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의료는 AI 변곡점이 가장 빨리 나타나는 산업입니다. 의료 영상은 이미 PACS 기반으로 디지털화되어 있고, 판독 결과라는 고품질 라벨 데이터가 존재해 지도학습에 이상적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루닛은 유방암·흉부 X-ray AI로 다수의 FDA 510(k) 인허가를 확보했으며, 전 세계 65개국 이상에서 1만 개 이상의 의료기관과 파트너 사이트에 솔루션이 도입되었습니다. 뷰노는 뇌영상·폐결절·골연령 분석·심정지 예측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면서 미국 FDA, 일본 PMDA 등 주요국 인허가를 확보하며 글로벌 레퍼런스를 확대 중입니다. 기술 경쟁력과 시장 확장성 모두 입증된 기업들입니다.


하지만 글로벌 판도 전체를 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GE Healthcare, Siemens Healthineers, Philips, Aidoc, Viz.ai 같은 의료기기·헬스테크 대기업들은 매출 규모, 설치 베이스, 정부·보험 체계와의 연계력에서 압도적입니다. 한국 기업은 이들과 견줄수 있는 강점을 일부 확보했지만 "패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국은 대형병원 집중 구조, 높은 PACS 보급률, 의료진의 디지털 수용성 덕분에 데이터 품질과 일관성이 세계 상위권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의료는 AI가 기존 권력을 쉽게 무너뜨리기 어렵지만, 한국이 방어를 넘어 공격적 확장까지 노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야입니다.


제조 — 한국의 '특정 산업군'에서 빛나는 깊이


제조업은 데이터의 깊이와 공정의 복잡성이 곧 경쟁력입니다. 최근 한국 정부가 2028~2030년까지 조선·철강·자동차·반도체 중심으로 'AI 제조혁신' 프로젝트를 확대한 것도 이러한 구조 때문입니다. POSCO는 제강 공정에서 온도·성분·에너지 변수를 실시간 최적화하는 AI 시스템(PosFrame 등)을 운영 중이며, 삼성전자는 실제 공정에서 수율 예측에 AI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도 도면-배관-용접-조립에 AI 기반 자동화를 도입해 나가고 있으며, 적용 범위를 단계적으로 넓혀가는 중입니다.


물론 독일 Siemens, 일본 Fanuc 등 글로벌 제조 강국도 장기간 축적된 센서·설비 데이터를 바탕으로 강한 AI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반도체·철강처럼 한국이 세계 최상위 점유율을 유지해 온 산업에서는 데이터 규모 + 공정 복잡성 + 운영 노하우라는 조합 덕분에 상대적 우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독점적 우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 제조업이 AI 시대에도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금융 — LLM 빅테크에 종속된 구조


금융은 겉으로 보기에는 AI가 가장 빨리 적용되는 산업처럼 보입니다. 모든 데이터가 디지털로 남고, 규제가 명확하며, 자동화 기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초 AI 기술의 주도권이 해외에 있다는 점이 구조적 제약이 됩니다.


금융사의 문서요약·리스크 분석·고객 상담 자동화 등은 대부분 LLM 기반이고, 글로벌 금융사도 자체 모델 개발보다 OpenAI, Google, Anthropic, Meta(Llama), Mistral 등의 범용 모델을 파인튜닝하거나 래핑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습니다. 한국 금융사도 마찬가지로 외산 LLM 위에 서비스를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금융의 핵심 AI는 여전히 FDS, 신용평가, 리스크 모델링처럼 트리 기반 머신러닝이 중심입니다. LLM은 이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위 계층"을 담당하는 보조 역할이 많습니다.


즉, 금융 AI는 혁신은 빠르지만, 기초 기술 주도권은 글로벌 LLM에 종속된 채로 작동하는 산업입니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국가가 공통으로 겪는 구조입니다.


콘텐츠 — IP는 강하지만 생성 인프라는 미국·중국이 장악


콘텐츠 산업은 AI로 인해 가장 빠르게 실질적 변화가 발생하는 분야입니다. 한국의 K-pop, K-드라마, 웹툰, 게임은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입증했고, 생성형 AI가 대본·음성·영상·캐릭터 제작의 비용을 크게 낮추면서 "한국이 수혜를 볼 것"이라는 전망도 많습니다.


하지만 장밋빛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할리우드는 Runway, Pika, Sora 등의 고성능 비디오 생성 모델을 적극 실전 투입하고 있고, 중국 ByteDance는 쇼폼·커머스 영상 자동화 분야에서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생성형 영상·음성 인프라는 명백히 미국·중국이 장악하는 구조입니다.


한국은 강력한 IP 풀과 창작 생태계를 보유한 만큼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승리는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습니

다. AI 시대 콘텐츠 경쟁은 누가 더 좋은 IP를 선제적으로 구조화하고, 더 큰 데이터 플랫폼을 만들고, 더 빠르게 기업 생산 라인에 통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국방 — 폐쇄성이 자국 생태계를 강제합니다


국방은 모든 산업 중 규제와 폐쇄성이 가장 강합니다. 미국은 이미 Palantir, Microsoft(IVAS), Google(Project Maven), AWS 등을 통해 국방 AI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한국은 국방 데이터가 국가 안보 사유로 폐쇄적으로 관리되며 무기체계 개발 기업도 국내 방산사(KAI, 한화, LIG넥스원)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상용 LLM이나 외산 클라우드가 직접 침투하기 어렵고, 자율드론·표적 인식·ISR·레이더 분석 등은 국내 생태계가 계속 구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도입 속도와 범위는 기술보다 정치·예산·안보 논리에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국방은 AI 시대에도 자국 중심 생태계가 유지되는 몇 안 되는 영역입니다.


전력난 — AI 확장의 물리적 한계


최근 몇 달간 가장 빠르게 부상한 변수는 전력 공급의 한계입니다. 일부 리포트에 따르면 2030년까지 AI·데이터센터 전력이 150% 이상 증가할 수 있으며, 미국·유럽·한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망 포화로 신규 데이터센터 인허가에 대한 논의와 규제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이미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 급증으로 신규 연결에 일정 부분 제한 조치를 취했고, 미국 버지니아·텍사스·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도 유사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이 리스크가 커지자 블랙록, 브룩필드, KKR 같은 글로벌 인프라 자본이 "AI 데이터센터 + 재생에너지 + 전력망 업그레이드"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대규모 투자에 나섰습니다. 전력·그리드·데이터센터를 한꺼번에 인수하거나 개발하는 "전력-데이터 인프라 수직 통합" 전략이 등장한 것입니다. AI 산업의 확장 속도가 GPU보다 전력·부지·냉각이라는 물리적 제한에 좌우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산업별 전략이 아무리 뛰어나도 전력이 부족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AI는 결국 물리적 인프라 위에서 돌아가는 기술이며, 전력은 그 기반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한국은 비대칭적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를 종합하면 한국은 AI를 잘 쓰는 나라이지만 동시에 AI로 인해 산업이 가장 비대칭적으로 재편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의료와 제조의 일부 산업군에서는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고, 콘텐츠에서는 IP 기반의 유력한 기회를 보유하며, 국방에서는 폐쇄적 구조 덕분에 자국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금융·공공·일반 서비스는 해외 빅테크 인프라에 종속되어 있고, 데이터센터·전력 인프라는 급격한 투자가 이루어지지만 여전히 중요한 제약 요인으로 남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AI 전략은 단일한 답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산업마다 데이터·규제·기술·자본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각 산업별로 전혀 다른 전략 조합이 필요합니다.


한국이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는 어떤 AI 모델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AI가 재편하는 산업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차지할 것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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