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사격 연습 시에 배정받는 자리를 “사로”라고 한다. 쏘는 길이라는 뜻인데, 사로에 엎드리거나 앉으면 내 총알이 지나가야 할, 맞추어야 할 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귀와 전두엽을 울리는 굉음도 함께.
중국에서는 “사로 思路”가 생각의 길을 뜻한다. 생각의 길에 앉으면 지나가야 할, 달성해야 할 것이 잘 안 보인다. 물론 귀와 전두엽을 울리는 스트레스는 전신까지 울리곤 한다.
“사로”는 죽음(死路)의 길을 뜻하기도 하는데, 죽자고 달려드는 길도 거닐어 보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다녔던 길도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목표에 대한 가시성은 오히려 더 좋았던 것 같다. 다시 걷고 싶지는 않다.
다시. 생각의 길에 빠져있다 보면, 매 순간 내리는 결정의 방향과, 이를 표현하는 언어적 특징과, 신체의 제스처와 가끔은 분노의 발산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는 이렇지 않다는 자기부정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곱씹어 보면 아들인 나는 아버지의 그 무엇과 닮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의 화법과 성향은 아버지를 닮아있다.
사상은 같지 않지만 사로만큼은 공유되는 피로 맺어진 관계. 뭔가 마교의 천마비공 같은 관계.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무의식으로 얽혀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의 화법과 비슷하게 이야기하고, 동시에 그 화법을 경계하며 새로운 나의 화법이 발전되어 간다.
가끔은, 아버지라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 가 궁금하기도 하다.
20, 30대에는 내가 당신과 같은 사로를 공유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외면했다. 모든 아들이 그렇듯 그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삶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유전자는 다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유전자를 조금 더 시대와 세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게 내가 갖고 태어난 것이니까.
간만에 아버지와 일상이 아닌 다른 이야기로 전화 통화를 길게 했다. 그의 화법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유해지기도 했지만, 우리의 사로가 공유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거슬리던 것이 그냥 잘 들렸다.
참, 부자관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