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수업을 영 적응하지 못하던 마야는 결국 랭귀지 스쿨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다면서 클래스를 떠났다.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니, 다시 조용한 아싸가 되었다. 다음날 졸지에 일본인 짝꿍을 빛의 속도로 얻었다 잃는 나에게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다가와 말은 걸지 않았다. 씁쓸..
클래스 메이트들과 친해질 시기를 놓친 탓에 그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했다. 마음속으론 무안하기도, 쓸쓸하기도 했지만 한 마리의 사자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했다. 매일 사자의 가면을 쓴 양 한 마리가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항상 1등으로 교실에 출석했다.
수업 시간보다 30분 일찍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았다. 전날 수업을 미리 복습하고 영어단어를 외웠다. 맨 앞에 앉아야 저들을 안 볼 수 있었고, 어색한 쉬는 시간도 그럭저럭 견딜만했기 때문이다. 때론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을 들렀다 한참 있다가 수업에 들어왔다. 삼삼오오 자기네 나라 언어로 이야기하는데 나만 덩그러니 있는 느낌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룹 미션을 해야 하는 때가 왔다. 자연스럽게 인도인, 중국인, 이슬람인들은 그룹이 나누어졌다. 저 셋 그룹 중에 나는 한 군데로 들어가야만 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저 셋 그룹 중에 어느 쪽으로 들어가고 싶냐고 친절히 물었다. 모두가 나를 향해 시선이 또 한 번 쏟아졌다. 최고의 난제에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중국인 그룹으로 들어가?'
그래도 같은 아시아권이고, 외모도 제일 비슷하니 괜찮지 않을까? 호텔 레스토랑에서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소피도 중국인인데 괜찮았잖아. 아니야 아니야. 쟤네들은 너무 시끄러워. 목소리도 너무 크고, 쉬는 시간마다 왜 저렇게 땅콩은 먹어대는지 바닥에 땅콩 껍질이 수북해... 지저분한 건 딱 질색이야.
'그럼 인도인 그룹으로 들어가?'
소 눈망울처럼 순박하게 생기긴 했는데,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내 코를 찌르는 강렬한 겨 냄새는 못 참을 것 같아. 막혀있던 비염도 뚫어 낼 만큼 강력했어. 함께 그룹 미션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질식할지도 모르겠어..
'그렇담 남은 그룹은 이슬람?'
눈 만 보이는 니캅을 입은 쟤는 좀 무서워 보이는데... 얼굴만 보이는 히잡을 쓴 쟤는 좀 착해 보여. 쉬는 시간에도 조용하고, 공부도 항상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보였어. 이슬람 사람들과는 한 번도 교류를 해 본 적이 없으니 한번 시도를 해봐??
출처: 서울신문
마침 얼마 전에 본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2>가 생각이 났다.
영화에서 캐리와 친구들이 아부다비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 시장에서 사만다는 너무 더워서 짧은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노출이 있는 의상을 여자들은 입을 수가 없다. 남자들은 그런 사만다를 이상하게 쳐다 보고, 사만다는 그만 실수로 가방을 떨어뜨리는데 바닥엔 콘돔 한 무더기가 나 뒹군다. 이슬람 남자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사만다와 친구들은 곤경에 쳐한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니캅을 쓴 여성이 도와준다.
눈만 내놓고, 모든 곳을 가린 미스터리 한 여성을 따라 주인공들은 일단 피신한다. 니캅 요정을 따라간 그곳은 니캅과 부르카를 입은 또 다른 여성들이 몇몇 더 있었다. 어색한 공기, 눈으로 느껴지는 강렬함. 어느덧 그녀들은 주인공들은 안심시키기 위해 얼굴을 가린 스카프들을 하나 둘 내린다. 앳된 얼굴에 상당한 미녀이다.
그리고 발을 살포시 보여 주는데..
이런! 마놀로 블라닉 플랫 슈즈를 신었다. 까만색 전통 의상을 하나 둘 벗어던지는 그녀들. 안에 입은 의상은 실로 화려했다. 명품과 디자이너 의상, 명품백, 온갖 반지와 팔찌. 무슬림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걸 가리고 살아가지만 마음만은 소녀였고, 여자였고, 패션을 사랑하는 패션피플 들이었다.
그룹 미션을 해야 하는 이때 왜 갑자기 이 영화의 이 장면이 생각이 난 걸까?
그래. 결심했어. 나의 선택은 이슬람 그룹이었다. 이 그룹엔 3명이 있었는데 2명은 히잡을 썼고, 1명은 니캅을 썼다. 눈이 참 아름다운 니캅요정과 나는 이날부터 짝이 되었다.
어색한 소개를 한 뒤 그룹미션으로 친해진 우리는 커피를 함께 마시게 되었다. 이슬람권에서 온 친구 셋은 모두 결혼을 했더랬다. 남편들은 모두 RMIT 대학교에서 각각 엔지니어링 석사, 박사 과정을 밟고 있고, 한 친구의 남편은 건축학과 박사 과정 중이라고 했다. 놀기 심심해서 영어를 배운다는 셋은 참 긍정적인 친구들이었다. 아이라인 쇼핑을 좋아했고, 연예인에 관심이 많은 지극히 평범한 2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이었다. 호주로 유학을 오는 유학비, 생활비를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 나라 밖에서도 히잡과 니캅을 꼭 하고 다녀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답답하진 않아? 여름엔 많이 더울 것 같은데 말이야.."
"적응이 되어서 우린 괜찮아. 여름엔 조금 덥지만 ㅎㅎ"
"그런데 왜 여자들만 히잡과 니캅을 쓰는 거야? 남자들은 안 그러잖아."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문화가 다르니 그러려니 했다. 더 이상 물어보기엔 나의 영어가 짧았기에 종교 관련 대화는 여기에서 끝이 났다. 졸업을 하고 영주권을 따서 호주에 정착하는 이슬람 국가 사람들도 있었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꼭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래도 히잡은 얼굴을 내놓고 사니 덜 답답할 것 같은데 니캅와 부르카는 눈만 내놓으니 영 불편할 것 같았다.
그래도 내 짝꿍 니캅 요정의 크고 깊은 눈망울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르카인데도 눈 쪽에 모기장처럼 그물망으로 되어 있어서 눈조차도 전혀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얼굴에 뭔가를 뒤집어쓰고 산다는 게 얼마나 불편할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플랫화이트 한 모금 호로록하면서 순간 궁금했다.
'내 짝꿍 니캅요정은 눈만 빼고 다 가리고 있는데 커피를 도대체 어떨게 마실까? 마실 때 얼굴은 볼 수 있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니캅 요정은 커피잔을 마스크 안으로 쓱 넣고는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이후에도 그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수업을 수료했던 10주 동안. 단 한 번도.
겉모습이 무서워 보였던 무슬림 친구들은 의외로 따뜻한 면이 많은 친구들이었다. 섹스 앤 더 시티 2 영화 속 무슬림 여성들처럼 화려한 의상을 전통의상 안에 입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들고 다니는 백과 신발은 모두 명품이었다. 사실 아주 조금 부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명품과 자유를 선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테니 명품은 돈 모아서 하나 사는 걸로.
쉬는 시간마다 시끄러운 중국인과 인도인들과는 다르게 조용히 대화하는 무슬림 무리 속에서 소속감을 느끼며 더 이상 화장실에서 쉬는 시간 동안 앉아 있지 않아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