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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Apr 16. 2024

신서란 귀거래사(新西蘭 歸去來辭)

방황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며

자유로운 삶을 꿈꾸다

그때, 1992년 가을이 한참 깊어가던 11월의 어느 날 나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사십 대 중반이었던 나는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 둘과 아내가 있는 가장이었다. 지금, 고희(古稀)의 나이도 몇 년 전에 훌쩍 보내버린 내 눈에 보이는 사십 대들은 젊다 못해 어려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때, 겨우 사십 대 중반이었던 나는 벌써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돈이나 성공에 대한 큰 욕심이 없었다.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지금이나 그때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자유로운 삶이었다. 그 무언 가에도 그 무언 가를 위해서도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삶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을 이룬 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기업에 잠깐 다닌 적이 있지만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회사 생활에 숨이 막혀 금방 그만두었다. 그리곤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거의 맨주먹으로 시작한 무역회사였지만 때마침 불기 시작한 수출 붐에 힘입어 회사를 키울 수 있었다. 집도 샀고 작지만 사옥도 마련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자 사업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바이어를 만나는 것도 주문을 받아 선적(船積)을 하는 것도 매달 자금을 마련해 직원들 월급 주는 것도 차츰 나를 속박하는 올가미로 느껴졌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다. 


그땐, 큰 딸아이가 중학교 졸업을 얼마 안 남기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첼로를 치기 시작했던 아이가 이런저런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기에 아내는 아이의 유학을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작은 딸은 막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교육제도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큰딸의 첼로 교육을 위해서도 또 한국의 입시지옥에서 내 딸들을 구해주기 위해서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그때의 나는 그렇게 떠날 결심을 했다.


아이들을 위해 택한 나라, 뉴질랜드

내 아이들이 아들이었다면 아마도 남들처럼 미국행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수없이 다녔던 미국을 나는 결코 딸아이들을 보낼 수 있을 안전한 나라로 보지 않았다. 이곳저곳 생각하다 좀 멀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나라가 뉴질랜드였다. 영어권의 나라였고 기후가 온화했고 무엇보다도 지상의 마지막 낙원이라고 불릴 만큼 자연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순박한 나라라는 것에 마음이 놓여 그렇게 정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가족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곳 뉴질랜드로 왔다. 그땐, 1993년 5월이었다.


세월이 흘렀고 나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일하고 싶으면 일했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 큰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저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결혼을 했고 작은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호주로 건너가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을 했다. 아이들이 떠나자 우리 부부만 달랑 뉴질랜드에 남았다. 그리고 십여 년을 둘이서만 살았다. 아이들이 없는 집안은 적적했지만 대신 홀가분한 자유가 흘러넘치는 생활이었다. 아이들 위주의 삶에서 부부 위주의 삶으로 바뀌며 먼 옛날 결혼 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누렸던 한갓진 삶을 살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 삶의 가장 황금기가 지난 십여 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것은 우리 부부 둘 다 마찬가지였다. 그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처음 몇 년간은 일 년에 한 번씩 꼭 고국을 방문해 두어 달씩 지내다 돌아왔다. 다행히 큰 딸 집에 머물 수가 있어서 마음껏 고국 생활을 즐기다가 돌아왔다. 고국에 가면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지만 가장 큰 기쁨은 나를 반겨주는 어릴 적 옛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너무 오랜동안 만나지 못해 다시 만나면 서먹서먹할 것 같았지만 어릴 적 친구들은 만난 뒤 잠깐 지나면 어느새 까마득한 그 옛날의 다정한 사이로 돌아가 있었다. 철없었지만 순수했던 시절에 쌓아놓았던 우정이기에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이 그대로 우리 사이를 지켜주었다. 고국에 갈 때마다 너무도 반겨주고 진심으로 대해 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해마다 고국으로 가는 발길이 그렇게 가벼웠고 돌아올 때는 그렇게 마음이 허허로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리워지는 고국

2020년에는 1월에 고국을 방문했다. 모처럼 연초에 고국에 머물며 친척들도 만나고 친구들과 회포도 풀고 싶었지만 중국에서 발발하여 별안간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로 인해 쫓기듯 뉴질랜드로 돌아와야 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가슴이 답답했다. 처음에는 안 쓰던 마스크를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때 나는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을 고국과 뉴질랜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내 몸과 마음의 불안정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정체성(正體性)을 생각했을 때 가슴이 답답해진 것이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선가 아니면 신문에선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다가도 조국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귀국해서 힘을 합하여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고국에 코로나가 퍼져나가 모두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도망치듯 뉴질랜드로 돌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이 너무 비겁하게 그리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돌아가야겠다’라고 마음먹은 때가 바로 그때였다. 코로나에 쫓겨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코로나 사태만 진정되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라고 작정하였다. 코로나와 같은 세계적인 전염병을 평생 처음 겪는 나로서는 이 사태가 그렇게 오래 계속될지는 몰랐다. 가장 안전할 것 같았던 뉴질랜드에도 코로나는 들어왔고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더 이상의 확대를 막기 위해 정부는 국경을 막았다. 아무도 들어올 수고 없었고 나갈 수도 없었다. 길어야 몇 달이면 끝이 날 줄 알았던 코로나 사태는 해가 바뀌어도 진정이 안되었고 좀 잠잠해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일어나 극성을 부렸다. 


이런 악순환이 2년 반이 넘도록 계속되다가 다행히 2022년 봄부터 코로나의 세력도 약해지고 사람들의 면역력도 강해지자 정부는 국경을 열었다. 하늘길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나는 곧장 아내와 더불어 고국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두 달 열흘 동안 마음껏 고국산천을 누볐다. 발길 닿는 곳마다 고국의 하늘과 땅은 우리 부부를 반겨주었고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친지들과 친구들은 넉넉한 가슴과 따뜻한 손길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다시 자유로운 여생을 위해

“이번에 가면 정리합시다.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된 거 같소.” 두 달 열흘의 결코 짧지 않은 고국 방문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요. 저도 이번 여행을 통해서 고국이 얼마나 좋은 지를 실감했어요. 내 몸에 맞는 옷같이 편안하고 자유스러워요. 우리가 이제 무얼 더 바라겠어요. 돌아가서 맘 편하고 자유롭게 여생을 살면 되지요.” 평소에 말을 아끼던 아내가 웬일인지 마치 준비해 놓았던 것 같이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생각나게 하는 아내의 대답에 나는 더욱 힘을 얻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거의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을 같이 살며 아내와 나는 호사스럽게 살지는 못 했어도 자유롭게 살아왔다. 무엇인가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무엇인가를 크게 바라지도 않았기에 두려움 없이 훌훌 고국을 떠날 수도 있었고 낯선 곳에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옛 둥지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삼십 년 전 떠나올 때 그렇게 담담하게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다시 담담하게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남은 삶을 고국에서 산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두려울 것도 전혀 없다. 머물고 떠나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리 부부야말로 ‘우리는 자유다’라고 마음껏 외칠 수 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 돌아가서 자유롭게 또 새로운 삶을 삽시다,”라고 나는 내게 손을 맡긴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2022년 8월, 뉴질랜드로 돌아온 우리는 차분히 돌아갈 준비를 했다. 삼십 년 타국에서의 삶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집을 파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경기가 안 좋아 집을 팔기가 어려웠지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경기가 좋아지기 기다리다 시간이 흘러가면 고국에서 보낼 시간이 사라져 간다는 생각이 들자 누구든 원매자가 나타나면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팔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집을 팔았다. 그다음엔 다시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것 하나 정들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에서 차마 놓아버리기 힘든 것은 평생을 모아 왔던 책과 음반이었다. 책 한 권 음반 한 장마다에 추억과 손때가 묻어 있어 버리기 어려웠지만 그때마다 박경리 선생이 ‘옛날의 그 집’ 에서라는 시(詩에서) 말씀하신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를 떠올리며 과감하게 정리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삼십 년 동안 이 땅 신서란(新西蘭: 뉴질랜드의 한자표기)에 살면서 우리와 인연을 맺었던 모든 분들께는 너무도 죄송하여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그냥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떠나기 전 만나는 분들마다, 소식을 듣고 전화를 주시는 분들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몸은 떠나지만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렸지만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커졌다.


때마침 뉴질랜드 기독교 신문 크리스천라이프에서 우리 부부의 귀국을 기사로 다루어 주시면서 교민들 모두에게 석별의 인사를 할 수 있는 지면까지 내어주셔 그곳에 실은 시(詩)가 다음의 신서란 귀거래사(新西蘭 歸去來辭)이다. (2023년 2월 12일 크리스천라이프 기사 참고)


신서란 귀거래사(新西蘭 歸去來辭)


돌아가야 해

몸도 마음도 늙었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젊은 날 새로운 삶을 찾아 가족들 손을 잡고

고국을 떠난 지 삼십 년

이곳저곳 낯선 길을 마음껏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해 나 태어나 자라났던 곳으로


나이 들었다고 어찌 주저앉아만 있을 것인가

지난날이 아무리 아름다웠어도

모두 젊은 날의 한 자락 꿈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하늘 저 끝으로 사라져 가고

이제는 외로움이 꿈보다 앞서는 나이

돌아가야 해 어릴 적 내 친구들 기다리는 곳으로


아오테아로아

길고 흰 구름의 나라 하늘은 푸르고 맑지만

뭉게구름 떠다니던 고국의 하늘이 더욱 그리워 

자꾸 바다 저편 수평선만 바라보는 하루하루

남은 삶을 그리움 속에서만 살지 말고

이제는 돌아가야 해 낯익은 얼굴들이 날 맞아주는 곳으로


얼마나 변했을까 내 떠났을 때의 고국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 세 번 지났으니

못 알아볼 만큼 변했을까 내 추억 속의 정든 곳들

너무도 보고 싶어 몸보다 먼저 떠난 내 마음

벌써부터 고향산천 방방곡곡을 내려다보고 있네

돌아가야 해 더 늦기 전에 가서 다시 시작해야 해


잘 있어라 아오테아로아 길고 흰 구름의 나라

네 따스한 품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성장하였고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서 우린 곱게 나이 들었다

삼십 년 짧지 않은 세월 네게 진 신세 잊지 않으마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가슴 가득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해 부디 기쁜 마음으로 보내다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 옛날 고국의 정경

다시 그 꿈같은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그 속에선 콩나물시루 같던 국민학교 교실도 

아침마다 시달려야 했던 만원 버스도

모두 정답기만 해 못 견디게 그립기만 해

돌아가야 해 가서 그 정경 속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날마다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적막 속에 홀로 서있는 나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어 이명(耳鳴)인 줄 알았어

한참이 지난 뒤에 알았어 고국이 날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나는 고국을 잊었어도 고국은 날 잊지 않았어

돌아가야 해 날 부르는 고국의 소리 영영 사라지기 전에


고국은 어머니 같을 거야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 밥때를 놓치고 들어가도

따뜻한 아랫목에 밥그릇 묻어놓고 기다리시던 어머니 같을 거야

삼십 년 방황 끝에 몸도 마음도 지쳐 돌아가지만

고국은 어머니 같이 받아줄 거야 그 자상한 미소와 더불어

돌아가야 해 가서 그 아늑하고 따듯한 품에 안길 거야 


이제 또 다른 삶이 시작될 거야

모든 것 내려놓고 돌아가는 고국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삶

육신을 위한 삶이 아닌 영혼의 속삭임에 몸을 맡기고 사는 삶 

생명의 연장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사는 삶

천국을 기다리는 삶이 아닌 오늘 하루가 천국인 삶

돌아가야 해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돌아가야 해 


고국은 내게 할 일을 줄 거야 

늙고 힘없지만 고국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줄 거야

무슨 일거리를 주던 나는 즐겨할 거야 고마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으쓱으쓱 어깨춤을 추며 일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정다운 친구들과 어울려 정담을 나눌 거야

돌아가야 해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내 고국으로


지나간 삼십 년 머나먼 길을 돌아다니며

꿈꾸듯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왔어 

이제는 돌아가 땅을 굽어보며 살 거야 

땅의 숨소리 땅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살 거야

맨발로 땅을 밟으며 맨손으로 땅을 만지며 살고파 

돌아가야 해 그 속에서 살다가 언젠간 나도 고국의 땅이 되고파

2023년 2월 석운 씀

(*우리 부부는 2023년 3월에 귀국하여 행복하고 자유로운 여생을 고국 품에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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