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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Apr 23. 2024

구월이 되면

가슴속에 일렁이는 고국의 가을 바람

구월이 되면 내 마음은 어느덧 고국을 향해 있다. 


고국을 떠나 이곳 지구 반대편 남반구의 작은 나라 뉴질랜드에 삶의 둥지를 튼 지 벌써 이십여 년이 넘었다. 하지만 구월이 되면 고국을 향하는 몸과 마음을 나 스스로 어쩔 수가 없다. 구월이 되면 이곳 뉴질랜드에는 햇살이 따뜻해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봄바람이 꽃향기를 실어오지만 내 가슴속에서는 이미 고국의 스산한 가을바람이 일렁이며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는 낙엽을 실어온다.


그렇게 한 잎 두 잎 실려 온 낙엽들이 가슴속에 쌓이기 시작하면 켜켜이 쌓인 낙엽들 사이로 지나간 과거의 추억들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고 나온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도 보이고 그 골목길에 어둠이 내리면 전봇대 꼭대기에서 환히 빛을 내뿜던 가로등도 보이고 그 빛줄기 속으로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미는 옛 동무들 생각이 나면 나는 그만 새어 나오는 탄식을 참기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해마다 구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고국의 가을바람이 일렁거리기 시작하고 나는 최면에 걸린 양 주섬주섬 짐을 꾸린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잡고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고국엔 모퉁이 모퉁이 내 추억을 되살려주는 정다운 곳들이 있고 고국엔 언제 찾아도 날 반겨주는 형제들과 친구들이 있다. 그렇기에 고국은 고국을 떠나 있는 나에게는 언제나 사무침의 존재이다. 구월이 되면 그 사무침이 극에 달하여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고국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옛날 시선(詩仙)이라던 두보(杜甫)는 봄이 되어도 고향에 갈 수가 없어 향수(鄕愁)라는 시에서 ‘올봄도 또 이렇게 지나가니 언제 고향에 갈 날이 오랴(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라고 탄식했다지만 그에 비하면 비행기 표를 손에 들고 며칠 뒤면 고국에 도착해 고국의 가을을 만끽할 꿈에 젖어 있는 나는 너무도 행복하기만 하다. 


이제 사흘 뒤면 고국 행 비행기를 타게 되는 이 저녁에도 내 가슴속에선 일렁거리기 시작한 고국의 가을바람이 점점 더 세차지고 있어 나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고국의 친구들과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이번에 가면 만나야 할 사람들과 들려야 할 곳들을 다시 챙겨보는 사이에 밤이 제법 깊어졌다. 그렇지만 가슴속 가을바람은 잠자코 있지를 않기에 나는 잠이 들 수 없었다. 아니 나는 이미 고국의 어느 청명한 가을 들판에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아 바람이여 내가 사랑하는 내 고국의 가을바람이여 그 바람을 가슴으로 받아내며 나는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나는 허허로운 가을 벌판의 한 그루 나무이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잎사귀들을 떨구는 나무이다

잎사귀를 떨구며 잎사귀를 떨구며

나는 온몸을 활짝 비우고

내 안에서 여름을 보냈던 새들은 나를 떠난다


새들을 떠나보내며

나는 내 고국을 꿈꾼다

까마득한 그 옛날 가을바람을 타고 그곳에서

내가 날아와 여기 뿌리를 박았던 

그 고국으로 나는 새들과 같이 날아가고 싶다


지금 이 허허로운 벌판

바람은 불고 내 가슴은 벌판보다 더 비어 가고

몇 개 남지 않은 잎사귀들마저 떠날 채비를 하는 지금

나도 떠나고 싶어 한다

새들을 따라 바람을 따라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시원(始原)의 고국으로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엔 더 큰 바람이 일렁거리고

바람보다 먼저 나는 허허로운 가을 벌판의 한 그루 나무가 된다

마지막 잎사귀마저 떨어지면 

온전히 벗은 몸의 나를 끌고 

나는 부끄럼 없이 옛날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

바람이 일렁이면 내 가슴속에 생겨나는 곳

내 가슴속의 영원한 고국


2018. 9월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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