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풋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나와의 對話
56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할 때 나는 과연 얼마나 성장하였을까? 육신적으로는 그때보다 당연히 노쇠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는? 과연 성장하였을까?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고개가 양 옆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사실이 슬프다. 56년 전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17살, 아직 소년 티를 못 벗어난 사춘기의 끝 무렵에 있었던 나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시기를 살고 있었기에 이런 글을 썼을까?
며칠 전 서랍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오래된 공책(지금은 노트라고 하지만 옛날엔 공책이라고 했다)이 있었다. 무심코 그 공책을 펼치다가 나는 너무 오래되어 연두색이 형광을 발하려는 듯한 접힌 종이 하나를 발견하였다. 무엇일까 집어 보니 1965년 11월 7일 o o 고등학교 문학의 밤으로의 초대장이었다. 조심스레 초대장을 펼치자 <초대 말>이 보였다.
창살의 별이 따사롭습니다.
계절의 왕자,
들국화가
여기
조촐한 시를 읊조리고 있습니다.
싱그러운
내음에 도취되어
손짓 지어
벗을 부릅니다.
우리 모두
이
알찬 부름에
도취해 보지 않으렵니까?
-문예반-
풋풋한 젊음의 냄새가 싱그럽게 풍겨 나는 초대의 말이었다. ‘그랬군, 그때 내가 문예반이었군,’이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초대장을 펼쳤다. 세 쪽으로 된 초대장 안쪽에 순서가 나와있었고 그 한가운데 다음과 같이 내게 주어진 차례가 있었다.
<수필> 나와의 대화 (고 2) 김 ㅇ 찬
나는 너무 반가워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나이 든 요즈음은 불과 며칠 전 아니 몇 시간 전의 일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째서 어린 시절의 일은 아직도 꽤나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그날 초대장을 들여다보며 나는 까마득한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말썽만 부리던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아들이 문학의 밤에 나온다고 미장원에 다녀오셨던 어머니 생각도 났다. 초대장을 드렸더니 펼쳐보시고 순서 첫머리에 나온 ‘총평 양주동 님’의 성함을 보시고 “정말 양주동 박사님이 너희 문학의 밤에 나오시냐?”라고 물으시던 아버지 모습도 생각났다. “그럼요, 양주동 박사님이 우리 학교 선배님이세요,”라고 어깨를 으쓱했던 내 모습도 생각나 혼자 웃음도 터뜨렸다.
초대장을 손에 들고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며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리움과 회한에 나를 맡기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원하던 학교에 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다녀야 했던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고 방황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때 입었던 상처가 정말 크기는 컸었나 보다. 오십 년도 더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때 생각을 하면 마치 아물었다가 다시 도진 상처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실패가 있었기에 나는 삶의 외길에서 벗어나 일탈(逸脫)의 경험도 하였고 아픈 상처를 메우기 위해 학교 공부와 관계없는 여러 책을 읽을 수 있어 결과적으로는 삶의 폭이 넓어지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실패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소년은 좌절감과 열등감에서 꽤나 오랫동안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1965년, 17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방황의 극(極)을 헤매고 있었다. 학교 수업은 빼먹기 일쑤였고 뻑하면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를 하고 고궁을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동시 상영을 하는 싸구려 영화관의 뒷좌석에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공부는 하지 않고 공책에다 낙서나 다름없는 시나 단상을 적어놓곤 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변소(그때는 화장실이란 말을 안 썼다)에 가면서 공책을 덮고 가는 것을 잊었나 보다. 내 자리로 돌아오다 보니 옆 자리의 친구가 내 공책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뭐 해, 인마. 왜 남의 공책을 네 맘대로 봐!” 나는 험한 눈초리를 하며 공책을 빼앗았다. “어, 미안, 근데 너 참 글 잘 쓴다,”하며 그 친구는 내게 문예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내게 강력하게 문예반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나는 옆자리의 그 친구가 문예 반원이란 사실을 그날 알았다. 왜 그랬는지 나는 그날 그 친구의 권유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 내 눈치를 알았는지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자 그 친구는 끌듯이 나를 데리고 문예반 담당 선생님께 데려갔고 나는 그날부터 문예 반원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특활(특별활동) 시간에 문예반이 따로 모였고 나는 그 시간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절망의 늪에서 방황하던 내가 그땐 그것이 무엇이던 어딘가 정착하고 싶었고 마침 그때 문예반이란 작은 섬이 눈앞에 나타나자 무작정 상륙한 것이었다. 나는 지쳐있었고 어딘가에 머물고 싶었을 것이다.
며칠 전 그날 우연히 서랍에서 바로 그 공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그 옛날 옆자리의 내 친구가 그랬듯 호기심이 그득한 마음으로 공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첫 페이지에는 실존주의(實存主義)에 관한 정의와 사르트르와 까뮈의 소설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다음 장을 넘기니 2월 8일에 쓴 ‘잃어버린 歲月’이란 꽤 긴 자작시가 세 페이지에 걸쳐 있었고 계속해서 같은 날 쓴 ‘十代’라는 자작시가 역시 세 페이지에 걸쳐 있었다. 두 편의 시 모두에 한자와 외국어가 난무하고 있었고 외로움과 분노가 넘쳐났다. 왜 그렇게 외로웠고 왜 그렇게 분노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심각했었다. 공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때 일 년 동안 내가 거의 매일마다 시를 한 편씩 썼고 또 며칠에 한 편씩은 수필을 썼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지금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 사귀던 여학생에게 보낸 편지도 많았는데 그 내용이 문학과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성찰을 주고받은 것이었다.
처음엔 호기심 반의 가벼운 마음으로 분명 유치하기 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56년 전 소년의 글을 읽기 시작했지만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는 오히려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다했나, 아니 이런 걸 그 나이에 어떻게 알았지,’하고 혼자 중얼거리다 문득 벌써 고등학생이 된 서울에 있는 손자 생각이 났다. 요즘도 만날 때마다 어린애 취급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만 다음번에 만나면 장성한 청년 대접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공책 장을 넘기다 드디어 나는 ‘문학의 밤’에 발표했던 ‘나와의 對話’라는 수필을 발견했다. 1965.10.10이라고 날짜가 쓰여있으니 다음 달에 있을 ‘문학의 밤’에 나가려고 써놓았다가 원고지에 옮겨 제출했을 것이 분명했다. 너무도 반가웠다. 그 글을 보면서 나는 56년 전 1965년 11월 7일 저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강당(講堂)을 가득 채운 학생과 선생님 그리고 부모님이 보는 가운데 무대 앞으로 걸어 나가서 원고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었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되고 싶어졌다. 나는 원고 대신 공책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다음의 글은 토씨 하나 구두점 하나 바꾸지 않은 공책에 적혀있는 그대로의 글이다)
隨筆
나와의 對話
紙幣처럼 닳아 헤어지고, 距離의 플래카드처럼 賤해 빠진 都市의 秋心에 --------,
하루 종일토록 하늘은 흐리고 女人의 陣痛하는 몸부림같이 가끔 빗방울이 떨어져 왔다. 잠시도 休息을 取하지 못한 내 喪失된 言語의 조각이 빗방울을 意識하며 걷는 내 머리에 無의 思索을 부여하고, 힘없는 발길이 腐한 내 肉身을 걸머지고 저벅거린다.
‘허허허 ---,’ 이토록 헤심 한 들뜬 너털웃음을 터뜨려야 하는 許多한 Mortal들. 연이어 차가운 밤 空氣를 거슬리는 부스러진 웃음을 所有할 必然性을 타고난 사람들. 암담하고 매정한 삶의 벌판 위에 떠도는 充血된 瞳孔의 메마른 心事들.
지금, 人間을 향한 劣等感이 차가웁게 내 핏줄을 逆流하고 있다.
한 개, 한 개 完全히 離脫되어버린 孤兒들과, 우스꽝스러운 永劫을 爲한 廣場에서의 行進. 해마다 365日을 살고 날마다 24時間을 살아도 왜 삶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不滿스럽다. 鋪道에 뒹굴어 다니는 落葉의 對話는 무엇을 意味하는가? 흔연히 政治口號처럼 흔해 터진 한 마디를 중얼거린다. “人生은 無常한 것이다.”
성경, 찬송을 낀 무리들이 몰려온다. 그들을 避하여 좁은 골목길로 빠진다. 그들을 볼 적마다 나까지 죽음의 그늘 속에 휘감기는 것 같다. 그들은 항상 죽음만을 思惟하며 지내나 보다. 느즈러진, 꼭 장송곡과 같은 찬송가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죽음의 재를 呼吸하는 것 같이 숨이 답답하고 몸서리가 난다. 하지만 아침, 저녁 들리는 敎會의 鐘소리가 싫지 않은 것은 웬일일까? 결국 그들도 無常한 人生을 永劫에 멎기 위한 수단으로 神의 存在를 是認하려고 애쓰는 것일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이군. 나나 그들이나.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허탈한 웃음소리와 卑屈한 고함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리고 얼굴이 허연 酌婦가 실실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三流人生을 목숨하는, 아니 第一 高次的인 生을 享有하는 部類들이다. 창자의 고통이 完全히 마비되고, 혓바닥이 비비 꼬이도록 마시고도, 머릿속의 꿈틀거리는 상흔에 신음하는 저들이 所有하는 虛無와 내가 지닌 그것과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苦痛과 그리고 末梢的 快樂이 얼룩져서 허옇게 바랜 그들의 눈동자에 어떤 逆을 향한 眞理가 오히려 있어서 假飾된 나의 머리를 숙이게 한다. 나나 그들이나 같은 生을 한다는 데서, 같은 人間이라는 데서 어떤 共感이 간다. 生을 한다는 것은 단지 現在까지 生을 하고 있다는 意味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지금 싸느랗게 僞善된 永遠, 無數히 反覆되는 隊列들. –나는 異邦人이 될 必要가 있을까? - 구태여 내가 人生이라는 行爲自體에서 승화할 그럴 必要가, 아니 그렇게 멀리 떨어져 나갈 수가 있을까?
奢侈한 思索의 무리들, 나도 文明病에 들렸나 보다. 내가 돌았다. 精神病者처럼. 아! 精神病者,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어렸을 때 본 精神病者는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은 찢어지고, 아이들이 好奇心에 차서 따라다녔지. 어른들은 침을 퉤퉤 뱉고. 그래도 그는 혼자 웃고, 울고, 떠들면서 거리를 누비었지. 그때는 그들이 돌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들이 돌았는지, 或은 그들을 除外한 다른 人間들이 미쳐버린 것인지?
그럼 난 무엇인가? 한낱 하루살이 人生이지. 우습다. 팔딱이던 내 머리의 더운 血液이 차차 식어간다. 또 한 번 人間을 향해 逆流하는 차가운 劣等意識, 그리고 밀려오는 形而上學的인 것들.
虛無와 無常과 우울과 沈默.
街路燈의 숨결이 몹시 가냘프다. 아! 가을의 褪色한 落葉들이 내게 말해 주지 않는가? 人生의 無常함과 그리고 人間의 보잘것없음을.
바람이 몹시 차다. 그리고 나는 熱心히 걷는다. 空虛와 虛無에서 조금이라도 탈출해 보려고 애쓰는 人間들을 爲하여.
‘나와의 對話’는 여기서 끝이 났고 나의 독백 같은 읽기도 끝났지만 나는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내 후두부(喉頭部)는 아직 떨리고 있었고 내 목소리의 잔향(殘響)은 계속 방안을 맴돌고 있었다. 선 채로 그리고 공책을 양손에 든 채로 나는 내게 묻고 있었다. 요즈음의 나는 ‘나와의 대화’를 하느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56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보다 정신적으로 더 성장하였는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개를 떨구었다. 부끄러움이 가슴속 깊이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소년의 수필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熱心히 걷는다. 空虛와 虛無에서 조금이라도 탈출해 보려고 애쓰는 人間들을 爲하여.
소년은 열심히 걷는다고 했다. 인간들을 위하여. 얼마나 이타적(利他的)이었나!
나도 요새 열심히 걷는다. 내 건강을 위하여. 얼마나 이기적(利己的)인가!
한참 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문학의 밤’ 초대장을 노트 안에 끼어 넣고 노트를 서랍 속에 다시 잘 보관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지난 과거는 놓아주자. 그리고 현실을 인정하자.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나는 나다. 정신적인 성장은 없었다. 단지 무언가가 알고 싶어 헛되이 거두어들인 지식의 낙수(落穗)만 몸속 어딘가에 쌓였을 뿐이다.
계속해서 열심히 걷자. 하지만 이제는 보폭을 넓히자. 내 건강만을 위하여가 아니라 그 옛날의 소년의 마음처럼 人間들을 위하여, 방황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외로운 인간들을 위하여, 미약한 내 손길이지만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인간들을 위하여! 남은 삶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