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
찻집
에즈라 파운드
찻집의 그 소녀는
예전만큼 예쁘지 않네.
8월이 그녀를 쇠진케 했지.
예전만큼 층계를 열심히 오르지도 않네.
그래,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우리에게 머핀 과자를 가져다줄 때
그녀가 풍기던 젊음의 빛도
이젠 더 이상 우리에게 풍기지 않겠네.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The Tea Shop
Ezra L. Pound
The girl in the tea shop
Is not so beautiful as she was,
The August has worn against her.
She does not get up the stairs so eagerly;
Yes, she also will turn middle-aged,
And the glow of youth that she spread about us
As she brought us our muffins
Will be spread about us no longer.
She also will turn middle-aged.
에즈라 파운드(Ezra L. Pound 1885 -1972)는 20세기 시단(詩壇)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시인입니다.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 시단에 태풍처럼 일어났던 이미지즘(imagism) 시 운동(詩 運動)의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이미지즘(imagism) 혹은 사상주의(寫象主義)라고 불리는 이 시 운동은 그전까지 오랫동안 풍미하였던 낭만주의에서의 모호하고 불분명한 시어(詩語)에서 탈피하여 일상의 정확한 단어와 명확한 심상(心像)으로 시를 쓰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위의 시 ‘찻집’은 그의 많은 시 중에서 일반 독자가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시의 하나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낭만주의니 이미지즘이니 하는 시의 조류(潮流)는 뒤로 물리고 파운드가 소개하는 찻집과 그 찻집의 소녀에게 집중하면 됩니다. 계단을 열심히 오르내리고 머핀 과자를 손님에게 가져다주는 소녀가 있는 찻집이라면 1900년대 후반까지 거리 곳곳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다방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그 시절에 젊음을 보냈던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 옛날의 다방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다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탁자가 있는 의자에 앉으면 레지(레이디를 잘못 발음해 생긴 명칭)라고 부르던 젊은 아가씨가 엽차를 가져다주며 주문을 받았습니다. 레지의 역할은 꽤나 중요해서 이 레지의 용모나 태도에 따라 다방의 인기와 분위기가 바뀌기도 했습니다.
파운드가 단골로 다녔던 런던의 어느 찻집의 분위기도 옛날의 우리나라 다방과 비슷하였나 봅니다. 그리고 그 다방의 소녀 레지는 꽤나 어여쁘고 매력적이었기에 청순했던 소녀 시절부터 중년의 나이가 되기까지 한 찻집에서 손님들을 맞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어 손님이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마실 것을 직접 들고 다녀야 하는 요즘 카페와는 달리 파운드가 다녔던 찻집의 소녀는 팔랑거리듯 가볍게 탁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손님들의 시중을 들며 대화도 나누었기에 그녀는 가는 곳마다 젊음의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젊음도 아름다움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찻집의 소녀가 예전만큼 예쁘지 않다며 그 이유는 8월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국의 8월은 여름입니다. 영국의 여름은 우리처럼 덥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선하고 청명하여 영국인이 좋아하는 때입니다. 영국인이 여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소네트의 한 구절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름의 끝 무렵인 8월마저도 소녀를 거슬러(against) 힘들게 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녀의 발길을 무디게 만들었으니 문제는 8월이 아니라 8월로 대변되는 세월일 따름입니다.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찻집 소녀의 변화로부터 새삼 느꼈기에 시인은 곧 ‘그래,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라고 영탄합니다. 그리곤 다시 회상에 잠깁니다. 그 옛날 그녀가 과자를 가지고 다가올 때 자연스레 풍겨 나오던 젊음의 빛을 머릿속에 그립니다. 그리곤 체념하듯 단념합니다. 이제 곧 옛 소녀는 중년이 되고 더 이상은 그녀에게서 젊음의 빛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런 체념의 밑바닥엔 찻집의 소녀라는 거울을 통해 보이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모습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던 삶과 세월의 무상을 우리 주변의 대상에 투영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므로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 파운드는 단골로 다니며 자주 보던 찻집의 소녀에게서 어느 날 문득 ‘세월의 무상(無常)함’과 ‘사라져 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고 시심이 일어나서 이 시를 썼습니다.
우리도 시인과 같은 눈으로 우리 일상의 주변을 살펴보면 시인과 같은 마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문득 삶이 가르쳐주는 어떤 깨달음을 얻고 우리도 이런 시(詩)를 한 편 쓸 수 있지 않을까요?
2024. 8월 1일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