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결정해야 하는 걸음
마지막 한 걸음
혼자
헤르만 헤세
세상에는
이런 길 저런 길이 많이 있다.
그러나 종착지는 모두 똑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차를 타고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 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지혜나
능력도 이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혼자 하는 수밖에.
Allein
Hermann Hesse (1877-1962)
Es führen über die Erde
Straßen und Wege viel,
Aber alle haben
Dasselbe Ziel.
Du kannst reiten und fahren
Zu zweien und dreien,
Den letzten Schritt
Mußt du Gehen allein.
Drum ist kein Wissen
Noch Können so gut,
Als daß man alles Schwere
Alleine tut.
헤세 하면 무엇보다도 구름이 많이 떠오릅니다. ‘이 세상에서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나에게 보여다오’라고 외칠 만큼 구름을 사랑하였던 헤세는 ‘흰 구름(Weiße Wolken)’을 비롯해 구름에 관한 시를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헤세가 걸어야 했던 삶의 여정은 그가 노래했던 푸른 하늘의 흰 구름처럼 평화롭지만은 않았습니다. 14살 때에 명문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일 년도 못되어 학교를 도망쳐 나온 헤세는 환경에 적응 못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짝사랑에 실패하자 신경쇠약에 걸려 자살까지 시도했다가 정신요양원의 신세도 졌습니다. 학업을 포기하고 시계부품공장 수습공으로 일하면서 방황하던 헤세는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대작가의 뒤안길은 참으로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길을 걸었던 헤세이기에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혼자(Allein)와 같은 시를 썼을 것입니다. 어느 날 지난 세월을 돌아보다 그때까지 걸어왔던 길들을 회상하던 그는 ‘세상에는 이런 길 저런 길이 많이 있다’고 독백처럼 읊었습니다. 그러면서 ‘종착지는 모두 똑같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종착지는 우리 누구나가 필연적으로 맞아야만 하는 ‘삶의 끝’ 일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은 그 형태에 있어서 달라 보일지 몰라도 그 본질은 결국 같기에 헤세는 ‘종착지는 모두 똑같다’고 합니다. 그 종착지까지 오는 여정이 어떠하였건 그 종착지에 도착하기 위한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 가야만 한다’는 구절에 돌연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삶이라는 길 위에 있습니다. 이제까지도 그 길을 걸어왔고 오늘도 내일도 걸어야 하지만 어느 걸음이 마지막 걸음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걸음을 걸어야 할 순간에 왔을 때 우리는 헤세가 말한 것처럼 ‘혼자 가야만’하기에 그때를 위해서 언제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헤세는 우리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혼자 가야만 하는 마지막 걸음을 위해서는 어떤 지혜나 능력도 도움이 되지 않고 혼자 하는 수밖에’ 없다고. 우리가 이제껏 걸어온 여정이 성공적이었건 아니건 상관없이 ‘마지막 걸음’은 혼자 가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혼자’할 준비가 되어있으신지요?
걸음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 Schritt에는 비유적으로 조처(措處)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Den letzten Schritt, Musst du gehen allein은 마지막 조처는 혼자 내려야만 한다’고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구절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혼자 하는 수밖에’라고 헤세가 끝을 맺는 것을 보면 letzten Schritt를 마지막 걸음 대신 마지막 조처, 즉 삶의 마지막 결단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헤세가 이 시를 쓰면서 그런 생각까지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이런 생각까지 하면 보다 폭넓게 이 시를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헤세의 시 ‘혼자’를 읽다 보면 정끝별 시인의 ‘한 걸음 더’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같이 읽어 보실까요?
한 걸음 더
정끝별
낙타를 무릎 꿇게 하는 마지막 한 짐
거목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한 도끼
사랑을 식게 하는 마지막 한 눈빛
허구한 목숨을 거둬가는 마지막 한 숨
끝내 안 보일 때까지 본 일 또 보고
끝을 볼 때까지 한 일 또 하고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몰리니까 한 걸음 더
댐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한 줄의 금
장군!을 부르는 마지막 한 수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
이야기를 끝내는 마지막 한 문장
알았다면 다시 할 수 없는 일
알았다 해도 다시 할 수밖에 없는 일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모르니까 한 걸음 더
먼저 읽었던 헤세의 ‘혼자’와 정끝별의 ‘한 걸음 더’에서 공통으로 나오며 또한 핵심이 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마지막’과 ‘한 걸음’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헤세의 마지막은 ‘삶을 끝내는’ 마지막이고 정끝별의 마지막은 ‘삶을 반전시키는’ 마지막이니 서로 다른 마지막이라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좀 더 생각하면 ‘삶을 끝내는’ 마지막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크고 극적인 반전입니다. 삶의 끝 다음엔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헤세는 그 끝에 가기 위한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 가야만 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헤세는 그 끝이 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엄청난 반전이 있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 가야 하며 (타인으로부터의) 어떤 지혜나 능력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시를 끝맺은 것 같습니다.
정끝별의 시에서 ‘마지막’은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반전을 불러오는 ‘마지막’입니다. ‘낙타를 무릎 꿇게 하는 마지막’으로 시작해서 ‘이야기를 끝내는 마지막’까지 모두 극적인 반전을 야기할 무엇인가를 보여주지만 그 반전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한 걸음’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정끝별 시인은 말을 아끼면서 결론은 독자의 상상에 맡겼지만 그 ‘한 걸음’은 역시 ‘혼자 가야만’하는 한 걸음일 것입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가장 값진 금메달을 딴 선수는 어쩌면 골프에서 금메달을 딴 리디아 고일 것입니다. 리디아 고는 부모 따라 뉴질랜드로 이민 갔기에 뉴질랜드 국적으로 출전했지만 제주도 출신의 자랑스러운 한국의 딸입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 2016년 리우 올림픽 은메달과 2020 도쿄 올림픽 동메달에 이어 올림픽 메달 3종 세트를 모두 획득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파리 올림픽 골프 대회 마지막 날 시합에 출발하면서 속으로 ‘내 끝은 내가 결정하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미국의 전설적 체조 선수 ‘시몬 바일스’가 한 말로 이 말에 깊이 감동한 리디아 고는 어려운 때마다 이 말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바로 헤세와 정끝별이 그들의 시(詩)에서 강조한 ‘마지막’과 ‘한 걸음’을 풀어낸 말이 아니겠습니까? 리디아 고는 이 말을 되뇌며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디디며 올림픽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오늘 두 편의 시를 감상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도정 위에 있습니까? 종착지에 가깝든 아니면 정상을 향해 한참 올라가고 있든, 오늘 감상한 두 편의 시가 이야기하는 ‘마지막’과 ‘한 걸음’을 가슴에 품고 가시면 삶이 보다 크고 깊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2024. 8월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