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웃어라, 항시 웃어라.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얼굴을 붉히지 말고,
아무리 힘들고 속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얼굴을 찡그리지 말고 웃어라.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곧 숨을 서너 번씩 깊이 들이마시면서 웃을 일을 생각해 내라.
그걸 자꾸 연습하면 웃음 속에 내심을 감출 수 있게 된다.
남자(사람)는 마음에 층이 많을수록 크게 된다.
— 《아리랑》 중에서
요즘 저는 ‘직장인 사춘기’를 꽤 선명하게 겪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난 직장 생활 15년 동안 조금씩 계속됐습니다. 자리와 회사는 바뀌었지만, 질문은 같았습니다.
“이 길이 맞나?”
대학 때 읽은 조정래 작가님의 대하소설 3부작(태백산맥/아리랑/한강)의 자세한 사건들은 거의 잊었습니다. 그런데 《아리랑》의 위의 문장만은 이상하게 또렷합니다. 화가 나도, 속이 상해도, 일단 숨부터 고르라는 말. 그리고 마음에 ‘층’을 쌓으라는 말. 저는 이 문장을 요즘 업무에 그대로 써먹고 있습니다.
회의가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논점이 빗나가고, 말이 말을 부릅니다. 그때 저는 먼저 호흡을 세 번 합니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표정을 중립으로 돌려놓습니다. 웃음이라기보다 표정을 부드럽게 푸는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핵심 질문 하나만 던집니다. 이 순서를 따르면 쓸데없는 감정 소모가 줄고, 결론이 빨라집니다.
메일도 비슷합니다. 즉시 답장을 쓰면 톤이 날카로워지기 쉽습니다. 저는 임시보관함에 넣고 10분 뒤에 다시 봅니다. 그 사이에 숨이 가라앉고, 문장이 짧아집니다. “사실관계 한 줄 + 제안 한 줄 + 기한 한 줄.” 딱 세 줄이면 충분한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웃음’은 가면이 아닙니다. 억지로 웃다 보면 스스로가 닳습니다. 제가 배운 건 감정을 숨기기가 아니라 감정을 다루기입니다. 표정을 한 번 정리하고, 말을 늦추고, 사안을 앞으로 밀어붙일 힘을 남겨두는 일. 그게 제가 이해한 ‘웃음’입니다.
‘층’은 더 분명합니다. 하루에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이 눌리고 다져져서 생기는 경험의 지층입니다. 억울함도, 난처함도, 작은 성취도 그대로 쌓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층이 판단력과 어휘가 됩니다. 예전에는 감정부터 나갔다면, 지금은 질문이 먼저 나갑니다. 그 차이가 제 층의 두께입니다.
정리하면, 저는 아래 세 가지를 일과에 붙였습니다.
호흡 세 번: 어깨를 내리고, 코로 천천히.
표정 정리: 입꼬리를 살짝 올리되, 과장하지 않기.
핵심 한 줄: 기준/제안/기한 중 하나만 먼저 말하기.
대단한 비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가 있으면 하루가 덜 흔들립니다. 똑같이 바쁜데도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이 있습니다. 후회 대신 기록, 감정 대신 근거, 아무말 대잔치 대신 결정과 실행이 남습니다. 결국 직장인 사춘기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매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통증이 올 때 호흡을 세고, 표정을 정리하고, 한 줄을 고르면 통증이 방향으로 바뀝니다. 그 방향이 또 하나의 층을 만듭니다.
20년 전 대학생 때 밑줄 그었던 문장 하나가, 마흔이 넘은 지금 제 하루를 붙잡아 줍니다. 책의 대부분은 잊혀도 괜찮습니다. 필요한 때 켜지는 문장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쓸모없는 걱정은 있어도, 쓸데없는 경험(독서 포함)은 없습니다.
경험은 층이 되고, 그 층은 내일의 저를 버티게 하는 바닥이 됩니다. 오늘도 그 바닥 위에서 천천히 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