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디언스 Dec 29. 2021

골드베르크의 코스모스

재즈 브루잉 - Goldberg Variations (Uri Caine)




Goldberg Variations : Aria and 70 Variations Adapted, Arranged and Composed by Uri Caine (Uri Caine, W&W)


대학입학시험을 본 직후니까 딱 이맘때였다. 날씨가 매섭게 추웠던 그날 아침, 아버지와 동네 목욕탕에 가면서 들었던 음악이 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누구의 연주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어폰으로 들리던 워크맨 속 피아노음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차가운 날씨, 가슴을 때리던 명징한 피아노 소리, 그레이 컬러의 오버 깃을 올리시고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재촉하시던 아버지의 미소까지도 선명하다. 집에서 목욕탕까지의 거리는 불과 10여 분 남짓이어서 미처 연주를 다 듣진 못했다. 조급한 마음에 젖은 몸을 제대로 말릴 새도 없이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허겁지겁 목욕탕을 나섰다. 그런 기억 때문에 한겨울에 듣는 바흐의 골드베르크는 나에겐 정말 특별한 음악이다.




무수히 많은 골드베르크 앨범 중에서도 글렌 굴드의 데뷔 앨범인 1955년의 파격적인 연주와 로잘린 투렉이 1999년에 녹음한 정결하고도 사색적인 연주를 특히 좋아하는 편이다. 그 외에 재즈로 변주한 자크 루시에 트리오의 골드베르크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번에 소개하는 골드베르크는 재즈 피아니스트 유리 케인이 그의 앙상블과 함께 2개의 CD에 가득 채워놓은 앨범(원제 Goldberg Variations : Aria and 70 Variations Adapted, Arranged and Composed by Uri Caine)이다.




https://youtu.be/7vJHixZmaO8


레이블 W&W에서 발매된 이 앨범은 여타 골드베르크 앨범과는 비교할 수 없이 특이하다. 첫 번째 트랙인 '아리아'를 들을 때만 해도 평소에 들어왔던 골드베르크의 익숙한 멜로디가 별 거부감이 없다. 그리 특별한 앨범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점차 트랙이 넘어갈수록 그야말로 파격을 넘는 다양한 스타일에 깜짝 놀라게 된다. 가히 골드베르크의 코스모스라고나 할까? 이 세상 모든 장르의 음악이 마치 바흐의 골드베르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로크 음악의 대가 바흐의 골드베르크가 재즈, 딕시랜드, 가스펠, 뮤지컬, 스윙, 일렉트릭, 힙합 등으로 변주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바흐 시대에 연주되었을 법한 익숙한 스타일의 변주가 나오다가 난데없이 1920년대 시카고에서 연주되던 루이 암스트롱의 밴드 '핫 파이브' 스타일의 변주가 튀어나온다. 그런가하면, 현악 4중주와 피아노가 라흐마니노프를 연상케 하는 스타일로 연주되기도 하고 그렉 오즈비의 알토 색소폰이 등장하기도 한다. 급기야 뮤지컬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능청스러운 남성 보컬로 듣게 되면 반쯤 넋이 나가게 된다. 이쯤에서 대부분의 리스너는 '대체 이 앨범의 정체는 뭐지?'라고 하면서 이마에 손을 얹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 뻔하다.


https://youtu.be/_IOMIOFV1Jo


그렇게 두 개의 CD를 혼란과 경이로움 속에서 정신없이 듣다 보면 어느새 CD 2의 32번 트랙인 아리아의 익숙한 선율을 만나게 된다. 그제야 겨우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두 시간이 넘는 혼란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유리 케인은 마음을 놓고 있는 리스너의 허를 단숨에 찌른다. 정확히 2분 43초 동안 가느다란 파동만이 존재하는, 진정한 마지막 트랙 33번 'Eternal Variation'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희한하지 않은가. 음악을 담은 음반에 일정한 옥타브의 파동만 존재하는 트랙이라니. 이 앨범을 처음 들었던 당시엔 혹, 불량 음반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을 정도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대담집 '평행과 역설'(도서출판 마티)에서 '침묵에 대한 저항'과 '침묵으로의 회귀'에 대하여 말한다. 두 사람이 ‘침묵에의 저항’의 예로 언급한 곡은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 5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 선율의 비장하면서도 강렬한 울림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교향곡 제 5번은 운명의 문 앞에서 조차 결코 무력하게 순응하지만은 않는 인간의 위대한 저항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른바 ‘운명 교향곡’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침묵으로의 회귀’의 적절한 예는 어떤 게 있을까?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감히 나는 이 앨범을 들고 싶다. 위에서 말한 CD 2의 33번 트랙 때문이다. 2분 43초간의 ‘소리 없는’ 마지막 트랙이야말로 '침묵으로의 회귀' 바로 그것이다.


아리아로 시작하여 아리아로 끝나는 보통의 골드베르크와는 달리 이 앨범에서는 텅 빈 소리로 존재하는 33번 트랙을 듣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 눈을 지그시 감게 된다. 2시간 30여분에 걸친 골드베르크에 대한 긴 여정을 비로소 마치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 같기도 하다.


바흐의 골드베르크를 클래식 본연의 연주는 물론, 재즈, 뮤지컬, 일렉트릭, 힙합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스타일로 변주하고 있으니 조금은 난감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맨정신엔 들을 수 없다고 꾀를 부릴 수는 있겠으나 CD 2의 마지막 트랙인 33번 트랙만큼은 꼭 들어보길 바란다. 2분 43초간의 침묵을 통하여 텅 빈 부족함에서 오히려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독일의 레이블 'W&W'에서 발매된 앨범답게 앨범 자켓의 물성 자체 또한 예술적이다. 두툼한 아트지로 한 팩 한 팩 수공예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보석 같은 앨범이다.





작가의 이전글 커피를 끓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