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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토리 Nov 17. 2024

나의 발작 버튼

나를 어떻게 다뤄야하는 걸까

나에게는 들으면 발광하게 되는 발작 버튼이 있다.
남도 나와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알고 있거나, 아직 발견되기 전이거나


독수리의 등에 올라탄 까마귀의 공격을 이기는 방법에 대한 글을 본 적 있다. 까마귀를 공격하면 독수리는 까마귀를 쫓아내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조용히 날아오른다고한다. 올라갈수록 산소가 줄고 까마귀는 독수리의 등에서 알아서 떨어져 나간다. 남이 방해하던 말건 내 갈 길 가면 적들은 알아서 떨어진다는 그런 의미를 담은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들 인생도 독수리처럼 살아보라고 말이다. 멋진 글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본능적인 의문이 들었다. 나의 발작 버튼이 눌리면 나는 독수리처럼 더 높이 날지 못하고, 까마귀를 죽일 듯이 공격하기 때문이다.


나의 발작 버튼은 내게 “너는 할 수 없어”같이 나의 한계점을 정하는 말이다.


그 누구도 모르는 미래를 현재의 모습으로 한계를 그어버리는 일. 그건 삶을 살아가게 하는 희망의 꽃을 꺾어버리는 것과 같다. 묻지도 않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판단내리는 사람들을 향해 못 배워도 너무 못 배웠고 말하며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의 화는 정당했다. 정당해야만 했다. 나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화를 낸 후에도 상대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으려 했다. 미안함을 느끼는 순간 그냥 별거 아닌 일이 감정적으로 날뛴 것으로밖에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랑하는 친구들이든, 별 관계 없는 사람들이든 말 속에 조금이라도 나를 제한하는 말이 있다면 똑같이 발작 버튼이 눌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무언가 말하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소중했던 관계들이 나의 발작 버튼으로 틀어져 가고 있었다.  남이 나에 대한 한계를 짓지 못하게 하는 일이 나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나를 지키려 할수록 힘들어졌다.





발작 버튼이 몇 번 눌리면 정말이지 기진맥진해진다.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지키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앞으로 이렇게 살면 행복할까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남들이 뭐라하든 이뤄내서 증명하든지, 아님 무시하고 갈 길가면 되는 것인데 난 왜 매번 그 말에 무너지고 마는 것일까? 그 말에 무던해지고 싶어 스스로에게 ‘넌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해보았다. 울컥하며 눈물이 고였다. 애써 눈물을 삼켰으나 깊은 슬픔을 느꼈다. 여태껏 이 ‘할 수 없다’말을 이겨내려고 무던히 애썼던 수많은 나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들을 늘려가며, 성취를 해나가야만 제대로 사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숙제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숙제 같은 삶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운 좋게도 배우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해 주었지만 난 뚜렷이 잘하는 것이 없었다. 좋은 식재료를 가지고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아빠는 종종 언니와 나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우리에게 가졌었던 기대감에 대해 말한 것이라 하지만 나는 그저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는 말로 해석됐다. 그래서였을까, 어른이 되고 나서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음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 자식 농사에 실패에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과 달리, 아빠는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말할 때마다 ‘네가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엔 넌 못할 것 같은데’라며 의문을 던졌다. 늘 그 말에 내가 왜 못하냐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게 의심의 꽃이 피어났다.


‘나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입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의 한계를 긋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확실히 혼자서 이 문제를 해쳐 나갈 자신이 없었다. 이것을 인정하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뚜렷해졌다. 주변에 나의 발작 버튼에 대해 말하고 그리고 도와달라고 말하는 일이었다. 진심이든 아니든 내게 할 수 있다고 말해달라고, 그러기 어렵다면 할 수 없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나의 치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마음에 걸렸지만, 주변에 말하면 말할수록 내 주변에 나를 믿고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 없다라고 스스로 판단 내리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에 집중했다. 보잘것없는 행동이라도 이는 내게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이런 노력에도 아직 나의 발작 버튼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전처럼 자주 눌리지 않는다. 지뢰가 존재해도 밟지 않도록 하는 임시 처방일지도 모르지만, 이제 나는 나의 지뢰 같은 발작 버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 발작 버튼이 없어질지, 평생 함께할지 모르지만, 이젠 나를 포용하며 살아갈 자신이 생겼다. 어느 글에서 똥통에 굴러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글쎄다.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내게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나를 더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의 발작 버튼이 살짝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어준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발작 버튼을 무엇인가?

발작 버튼과 잘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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