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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여유가 빠져버린 이유

조급함, 그리고 여유의 의미

by 망토리

전자레인지 30초도 기다리질 못한다. ‘삐삐삐’ 소리가 나기 전 어김없이 문을 연다.


몇 초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에도 나의 조급함이 드러난다. 내가 원하는 인생은 여유 있는 태도로 우아한 일상을 보내는 것인데, 현실은 조급함으로 빨빨거리기 바쁘다.


나는 순간의 지루함을 못 참을 때가 있다. 특히 지하철을 기다릴 때가 그렇다. 배차 간격이 짧아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지하철에서도 막상 몇 분이 남았다는 안내를 보면, 그 시간이 지겨워 미칠 것만 같았다. 고작 3분 정도 기다리는 시간에 미칠 것 같다는 기분이 들다니, 어지간히 참을성이 없다. 어디엔가 빠르게 도착해야 하는 것도, 급하게 해결할 일도 없음에도 나의 행동은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초조했다.


시간은 내가 마음먹는다고 빨라지지도, 늦춰지지도 않는데 괜히 왜 스스로의 마음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내 모습에서 원하는 삶과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내가 바라는 삶은 중심이 단단히 자리 잡힌, 흔들림을 우아함으로 승화하는 갈대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현실은 내 뿌리가 뽑히는 것도 아닌데, 뿌리가 날아갈까 봐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부여잡으며 바람이 더 세차게 부나 안 부나 쳐다보는 꼴이라 ‘여유’라는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다. 갈대를 동경하지만 동경에서 끝나는 내 모습은 변화할 수 있을까.



한번 사는 인생! flex 여유할수있잖아..?(덜덜)



경제적 자유를 얻어 원하는 걸 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꾼다.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물리적, 시간적 자유를 갖는 것. 차고 넘치는 돈이 가져다주는 자유감과 여유는 무시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게 차고 넘치는 돈이 있다면, 과연 나는 정말 여유로울 수 있을까? 실제로 돈이 넘치지 않으니 상상에 그칠 뿐이고, 나는 여유 있는 척만 하며 진짜 여유롭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과 환경이 주는 여유도 분명하지만, 나는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여유와 직결된다고 믿는다. 시간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시간을 예민하게 생각하게 된 이유도 이 공평함 때문이다.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루함과 이 답답함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소중했던 시간을 금세 빨리 털어내고 싶은 숙제처럼 변해버린다. 시간은 그저 흐를 뿐인데, 나의 시선과 태도가 시간의 가치를 바꾼다. 여유와 조급함은 결국 시간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나는 같은 초조함을 반복하곤 한다.


여유롭기 위해서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한 말은 아는데,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무적의 청개구리 정신이 있다. 그리고 이 청개구리 정신은 우주의 법칙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하지 말자 하면 하고 싶고, 하자고 하면 하기 싫은 그 마음 말이다. 그래서 “조급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방식이 아니라, 왜 내가 조급한지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여유를 위해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고 정의하면, 여유는 점점 멀어진다. “여유롭게 살려면 이만큼 벌어야 하고, 어느 정도 자유 시간이 있어야 한다”처럼 타이트하게 규정할수록, 여유는 달성해야만 얻는 것이 되어버린다.


오히려 마음이 급하고 참을 수 없을 때 그 마음을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방법을 찾는 게 필요하다. 내가 왜 이러지? 뭐가 문제일까? 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보다는 “지금 내가 지루하고 조급하구나, 그래서 답답하구나”라고 인정해주고, 그 상황에서 에너지가 가장 덜 들고, 가장 편안한 선택을 찾는 것이다. 여유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안정시켜주기 위함이다.


만약 무한한 자유 시간이 생긴다면, 나는 오히려 질식할 것 같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조급함이 생기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조급하다고 해서 뭔가를 빨리 처리한다고 해서 여유가 생기진 않는다. 그러면 ‘여유’라는 모습은 하나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는 게 아닐까?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한 가지 모습으로 여유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휴양지에서 모히또를 마시는 모습만이 여유라고 생각하면 일상에서 그 여유는 너무 멀어진다. 반대로 일상의 작은 쉼만을 여유라고 국한하면, 여유가 너무 협소해진다. 일상이든 특별한 날이든, 여유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가져야 일상 속에서도 더 편안하게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커피숍에서 한 잔을 즐기는 것도. 주말 오후를 텅 비우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갖고 싶은 고가 선물을 사는 것도 나에게는 소중한 여유다. 여유의 의미를 확장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여유에 다가가는 마음도 훨씬 편해진다. 여유는 꼭 대단한 것을 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정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둘레길이었다. 서울 둘레길에는 구간마다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데, 산에 갔다가 둘레길 표식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둘레길이 마음에 들었던 건 목표와 길이 명확하다는 점이었다. 길이 정해져 있어 표시만 따라가면 되고, 어디까지 가야 할지도 분명하다. 내 인생도 누가 이렇게 표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하지만 둘레길이라는 이름처럼 길이 정말 둘러간다. 직선으로는 20분이면 도착할 길을 2시간 넘게 돌아서 가야 한다. 처음 시작할 땐 비효율적인 짓을 내가 왜 하고 있나 싶어 현타가 왔었다. 나는 둘레길 스탬프를 찍고 싶어서일까. 둘레길 표시 마크가 주는 안정감 때문일까.. 온갖 생각과 투덜거림을 견디며 계속 둘레길을 걸었다. 걷는 것과 생각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게 없었기에, 둘레길이 내게 전해주는 메시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더 빠른 길이 있다는 것도, 굳이 걸어서 갈 필요도 없다는 것도 알면서도 이 선택을 한 이유를 곱씹었다. 그리고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여유를 발견하고 싶었음을 느꼈다.


여러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이 여정은, 둘러가도 결국 도착지에는 닿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런저런 공상과 계획들이 범벅이 된 머릿속은 걷다 보면 어느새 자연이 내게 들어왔고, 그 과정 자체가 나에게 여유였다. 여유를 찾는 데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지 않았다. 여유와 효율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졌다. 둘레길을 걸으며 나는 둘러가는 선택이 여유를 만든다는 새로운 정의를 얻었다. 이 경험은 내 안의 조급함을 들여다볼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그때부터 조급함은 단순히 억눌러야 할 감정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신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조급함을 나에게 주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이 신호를 잘 알아차리면,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내 마음이 내게 뭘 요구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바라는 여유를 더 잘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만의 여유를 탐색하는 일은 ‘나’라는 기본기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 우리는 삶을 숙제처럼만 살고 싶지 않다. 원하는 삶을 살고, 꿈을 이루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과정엔 실망, 슬픔, 화, 당황스러움 같은 부정적인 일들도 함께한다. 그 모든 걸 하나의 과정으로 보려면 여유가 필요하다. 여유는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보는 힘을 준다.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을 믿고 원하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 여유를 다양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조급함이 속삭이는 마음의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길 바란다.


당신에게 여유는 무엇인가?

그 여유 속에서 당신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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