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낭만 시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 Feb 26. 2021

자네 집의 술, 내 집의 꽃

아름다운 기브 앤 테이크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해옴세

백년쯤 시름 잊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김육(金堉, 1580~1658)



친구.

어려서는 동무고, 나이 들면 인생의 증인이고, 흥이 나면 벗이고, 알아주면 지인이고, 함께 도모하면 동지고, 따로 도모하면  비교대상이고, 꿍짝이 맞으면 단짝이고, 틀어지면 인생의 복병. 사회생활에서 인맥의 핵이고, 여가생활의 동호인. 학연과 지연의 결과이고, 우연과 필연의 성과.      


친구란 진짜 무엇일까요.   

   


(source: unsplash.com, by Fuu J)

나이 들수록 친구가 각별해집니다. 수명이 길어지고 생활전선에서 뛰는 기간이 늘면서 서로 의지하고 함께 늙어갈 친구가 절실합니다. 그런 친구가 있어야 진정으로 ‘갖춘 자’라 할 수 있죠. 살면서 기댈 데와 믿을 구석은 친구뿐입니다. 친구가 인생의 밑천이고 보험입니다. 인생에 운에 의한 반전과 실력에 따른 역전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잠재적 ‘귀인’과 ‘백마 탄 초인’을 깔아놓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인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TV특강에서 어느 명사가 그러더군요. 인맥을 찾기 전에 나는 남의 인맥이 될 주제인지 살피라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부침은 각자 다릅니다. 흥하고 망하는 것이 친구 간에 동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친구가 잘나갈 때 나는 죽 쑬 수 있고, 내가 살만 할 때 친구는 끌탕할 수 있죠. 어떤 때는 내가 계속 받고, 다른 때는 내가 계속 줍니다. 친구 사이에서 ‘기브 앤 테이크'의 시의적절은 따질 수 있어도 동시성을 바라기는 힘들어요.  


이 시조를 지은 김육 선생은 인생의 부침이 많았습니다. 10대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50대에 병자호란을 겪었습니다. 아무리 양반이었다 해도 참혹한 전란을 일생에 두 번이나 겪은 것은 엄청난 시련입니다. 전쟁 통에 명문대가였던 가문이 몰락했고 부모도 일찍 잃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다가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오른 후 인생 후반은 전란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는 데 바쳤습니다. 조정에 줄을 양반지주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기득권의 불합리한 특권을 뺏는 대동법의 시행을 관철시켰습니다. 대동법은 탈 많은 공물을 쌀로 통일해서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 부과하는 세법입니다. 김육은 조선시대 대동법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시인은 친구에게 집에 술이 익거든 자기를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집에 꽃 필 때 자기도 부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서 백 년 동안 시름 잊고 살 궁리를 하자고 합니다. 서로 삶의 부침이 있더라도 영원히 함께 하자는 얘기죠. 살다 보면 저 집에 술 익을 때가 있고 이 집에 꽃 필 때가 있습니다. 친구와 내가 동시에 흥할 때만 의기투합할 생각이면 운이 좋아도 30년을 버티기 어렵습니다. 백 년을 버티는 방법은, 인생을 오래 즐기는 비결은, 바로 김육이 말하는 ‘시간차’ 기브 앤 테이크입니다.


그러려면 신세질 때 의기소침하지 않고, 베풀 때 생색내지 않는 정신이 요구됩니다. 허물없는 친구란 함께 벌거벗고 사우나 하는 친구가 아니라, 시간차 기브 앤 테이크를 멋지게 그리고 오래 행사하는 친구입니다.


(source: imjess.com, by Maud Chalard)

친구란 내 사정 좋을 때 부르고, 내 사정 나쁠 때 붙으라고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 아닐까요? 여기서 흥망은 금전적, 경제적 개념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정서적, 정신적 개념입니다. 동병상련도 시간차가 있어야 효과가 있습니다. 함께 앓아누워 있으면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가족이나 부부는 원치 않아도 같은 흥망주기를 타기 쉽습니다. 그렇게 묶여 있습니다. 운명공동체죠. 하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내가 내리막을 탈 때 올라가는 친구. 친구가 높은 곳에 있어야 내가 미끄러지고 있는 것을 포착하기도 쉽습니다. 함께 가면서도 달리 가는 사이가 친구 사이입니다.   

  

진짜 친구란 술이 설고 익듯이, 꽃이 피고 지듯이, 서로 다른 기복을 겪으면서 함께 백년을 버틸 궁리를 하는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가 있나요? 있다면 어느 종신보험보다 든든할 텐데 말입니다. 


(title image source: translucid-minds.tumblr.com)

매거진의 이전글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