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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Feb 26. 2021

다정도 병인 양하여

인간의 조건


<다정가(多情歌)>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 조년(李兆年, 1269~1343)



옛날, 달빛이 배꽃을 하얗게 밝히고 은하수가 자정의  하늘을 흐르는 밤, 멀리 소쩍새 우는 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싱숭생숭한 마음이 더 애달파진 남자가 있었습니다. 때는 고려 후기, 나라의 위상이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있던 시절이었죠. 임금의 실정과 패륜에 반발해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간 신하는 아름다운 봄밤에 그만 억하심정이 울컥합니다. 시인의 마음을 보통은 우국충정으로 해석하지만, 그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 않았을까요.


이 조년의 <다정가>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이방원의 <하여가>처럼 흔치 않게 이름이 붙은 시조입니다. 그만큼 사랑 받는 시조죠. 내용을 끝까지는 몰라도 ‘이화에 월백하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참으로 강렬한 시구입니다. 봄밤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색기와 순수를 동시에 뿜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종장에 나오죠.  ‘다정도 병’인 시인은 '일지춘심'이 대변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현대시 중에 <다정가>에 대한 멋들어진 오마주가 있습니다.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보낸 시 <완화삼(玩花衫)>이 그겁니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을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지는 꽃잎 생각에 산도 차갑고 산새소리도 슬픕니다. 구름은 말없이 흐르고 술도 말없이 익지만 속은 저녁노을처럼 탑니다. 그리고 ‘다정한’ 나그네는 끝내 흔들리는 뒷모습을 보이고 말죠. 이 시를 받고 박목월은 그 유명한 <나그네>라는 시로 화답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source: picography.com)

나뭇가지가 설레서, 꽃이 져서, 길이 외줄기라서 슬플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능력입니다. 동물은 감정이입을 하지 않습니다. 동물은 진화와 본능이 프로그래밍한 대로 그저 앞만 보고 달립니다. 상황이 허락하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좇아서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죠. 동물은 그래서 죽을 때 여한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보다 완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은 내 일이 아닌 것에, 어떤 경우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애달파합니다. 그 마음이 ‘다정(多情)’입니다. 정이 많은 것. 정이 많은 사람은 슬픕니다. 슬플 일이 많습니다.


 남의 처지와 감정에 무심한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 성향이 심하면 소시오패스입니다. 한마디로 정이 없는 인간들이죠. 이들은 자기본위로 남과 상황을 조작하는 데 능합니다. 일견 유능하고 냉철하고 심지어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마음(heart)은 약하고, 다른 마음(mind)만 유난히 강한 부류랄까. 이 부류는 본인에게 직접 잘못하지 않으면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모두 악으로 분류합니다. 거기에 어떠한 가책도 갈등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정이 많아서 일을 ‘그르칩니다.’ 성공가도에서 자꾸 주변을 돌아보고, 혼자 뛴다 싶으면 외롭고 무안합니다. 함께 먹어야 배가 부르고 같이 기뻐야 뿌듯합니다. 할 소리를 하고도 눈치 보고, 할 일을 하고도 미안해합니다. 내 일도 아닌데 울화가 치밉니다. ‘그놈의’ 정이 자러가는 발목을 잡고, 길을 재촉하는 소매를 잡습니다. 구름처럼 달처럼 유유히 가지 못하고, 산을 쳐다보고 꽃을 돌아보고 강을 바라보면서, 한 번 가면 도로 오기 힘든 외줄기 길을, 그 길이 끝날 때까지 삼백 리가 됐든 칠백 리가 됐든 ‘흔들리면서’ 갑니다. 그래서 다정이 병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사람이기도 합니다. 다정함. 그것이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source: picography.com)

 이조년 선생의 바로 위의 형이 이억년 선생입니다. (이 집 오형제 이름이 맏이부터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이었습니다.) 이런 고사가 전합니다. 두 형제가 젊었을 때 길을 가다가 금덩이 두 개를 주워서 하나씩 가졌습니다. 그런데 조년 동생이 자기 금덩이를 강에 던져버립니다. 형이 없었으면 금덩이 두 개가 모두 내 차지였을 텐데 하는 마음이 싫어서 버렸습니다. 참 별 생각을 다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억년 형도 금덩이를 버립니다. 이 고사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정가]>를 남긴 이조년 선생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이 많으니 생각도 많았겠죠? 정 그러면 자기 황금도 형을 주지 버리긴 왜 버려? 하지만 그러면 얘기가 재미없어집니다. 이억년 선생도 정이 많았나 봅니다. 정이 많은 사람은 가끔 혼자 흥하느니 같이 망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래서 자기 황금도 냅다 버립니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공감(empathy)’을 말합니다.  마케팅에서도 정치인의 입에서도 공감이 유행입니다. 연민(compassion)이나 동감(sympathy)과는 다른 말. 공감. 감정이입과 역지사지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 인간이라고 다 있는 능력이 아니죠. 눈치껏 내 편에 붙으라는 말이라면  사양합니다. 고객 입장 운운하며 물건 팔아먹을 속셈이라면 거절합니다. 하지만 걱정이 팔자인 다정한 사람들을 인정해주는 말이라면, 목소리가 크지 않은 이들과 말 못하는 것들을 배려하면서 조금씩 느리게 살자는 말이라면 환영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건 아닙니다. 사람다움을 설명하는 말 중에 다정도 병이라는 말처럼 기막힌 말도 없습니다. 


(title image source: unsplash.com, photo by Liam 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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