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낭만 시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 Jun 08. 2020

봄바람 건듯 불고

나이 드는 기분: 시조로 보는 퀴블러-로스의 5단계론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잠깐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자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우탁(禹倬, 1262~1342)



신은 잔인하다. 인간에게 짧은 청춘을 허락하고 평생 그것을 그리워하며 살게 했다. 봄바람은 정말이지 ‘건듯’ 불었다. 사실 부는지도 몰랐다. 누렸나 싶게 봄이 가고 머리에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눈 녹이던 봄바람을 잡아서 머리의 서리도 녹이고 싶지만 인생의 봄은 일단 가고 나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 회춘은 말뿐이다. 그저 환상이다. 현실부정의 다른 말이다. 


젊음이 간다고 느끼는 시기와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친다는 게 문제다. 마음의 준비란 불가능하다. 어느 날 보니 가르마를 따라 흰머리가 하얗게 서 있고, 어느 날 보니 웃고 있지 않은 입가에 주름이 남아 있다. 어느 날부터 모공이 보이더니 얼굴선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어느 날’이 불현듯 온다. 일단 ‘어느 날’이 오면,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젊게 고치면 자연스럽게 젊어 보이는 것과는 정말로 안녕이다.      


나는 ‘어느 날’ 내 눈을 보고 말았다. 더는 초롱초롱, 반짝반짝하지 않은 눈.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거울이 깨지도록 째려봐도 이제 더는 어린 눈이 아니었다. 어쩐지 맥이 풀리고 빛깔조차 슬퍼진 눈. 그 눈이 묻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 눈에 비친 나는 얼굴색도 이목구비도 머리카락도 (심지어 팔뚝살도) 내가 기억하던 내가 아니었다.      


슬픔의 5단계 (source: verywellmind.com, illustration by Emily Roberts)

퀴블러―로스 모델(Kübler-Ross model)이란 것이 있다. 상실이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가지 순차적 단계를 말한다. 부정(Denial) ― 분노(Anger) ― 타협(Bargaining) ― 우울(Depression) ― 수용(Acceptance)의 과정. 누구나 다섯 단계를 모두 거치는 건 아니다. 분노 단계를 넘지 못하고 마지막을 맞기도 하고, ‘새 사람이 되겠다고’ 신과 부질없는 협상만 벌이다 끝나기도 한다.   

   

늙음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거겠지, 요즘 피곤해서 이렇겠지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틀 날밤을 새도 얼굴이 뽀송뽀송 탱탱 했다는 거.) 가르마를 바꿔가며 염색을 미루고 미룬다. 피부가 늘어지고 흰머리가 나는 것이 당연한 나이지만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순간 정말 폭삭할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우긴다. 세월이 나만 비껴갈 수 있다고 믿어본다. 누가 나를 내 나이로 보면 발끈한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     


그러면서 이제는 신경 쓰자, 관리하자 맘먹는다. 안티에이징 화장품의 막대를 잡고 콜라겐 캡슐의 가시를 쥐고 항전 의지를 불태운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늙어 간다. 몸도 2030 때 같지 않아서 없던 탈도 나고, 체력도 줄고, 다이어트를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인정할 건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아래 시조처럼 타협점을 찾는다.      


반(半) 넘어 늙었으니 다시 젊든 못하여도

이후나 늙지 말고 매양 이만 하였고자

백발아 네가 짐작하여 더디 늙게 하여라 

―이명한(李明漢, 1595~1645)     


인생 허리를 향해 달리는 나이를 어쩌리. 청춘은 갔다. 앞으로는 내리막길뿐이다. 꾸준히 늙을 일만 남았다. 다만 좀 느리게 늙었으면. 나이보다 꾸준히 다섯 살만 적어 보였으면.   

(source: tumblr.com)

하지만 인정은 씁쓸하고 타협은 서글프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고 그 사이로 바람이 횡횡 분다. 친구들끼리는 당당하게 늙자고 부르짖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자꾸 의기소침해진다. ‘이 나이에’가 입에 붙는다. ‘이 나이에’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옷을 입는 것도, 저런 데 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어릴 때는 나이 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줄 알았는데, 뭘 해도 어색한 이 느낌은 뭘까.      

 

늙지 않으려고 다시 젊어 보려터니 

청춘이 날 속이니 백발이 절로 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 지은 듯하여라

―우탁     


나이 먹어가며 은연중에 느끼는 소외감, 자격지심, 서러움, 면구스러움이 이 시조 종장에 고스란히 담겼다. 더는 ‘절대적으로’ 젊은 무리에 끼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이 사무친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상대적으로’ 젊기도 어려워지겠지. 더는 어디에서도 젊은 축이 되지 못한다면? 어릴 때 내가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들을 괄시했던 말들이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아이 적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 

어느덧 아이들이 날 웃을 줄 어이 알리

아이야 하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신계영(辛啓榮, 1577~1669)   

  

얼굴에서 나이가 보이는 것도 싫지만, 나이 값을 못한다는 말도 무섭다. 하지만 마음과 현실의 괴리감은 해마다 커진다. 마음이 나이와 따로 노는 나이. 이도저도 아닌 나이. 어중간한 나이. 죽지도 살지도 못할 나이. 질풍노도의 시기도 아닌데 주변인이 따로 없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넌들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좇아다니다가 남 웃길까  하노라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나이는 숫자일 뿐 중요한 건 마음이라지만 정말 ‘마음’대로 살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마음이 나이를 따라잡을 때가 올까. 내 나이가 편해질 때가 올까. 내게 수용의 단계가 과연 올까. 아니, 인간에게 늙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한 걸까. 지금 이 나이에서는 잘 모르겠다. 내게 나이 드는 기분이란 아직은 그저 뻘쭘하고 민망한 좌절일 뿐.  


(title image source: tumblr.com) 

매거진의 이전글 공산에 우는 접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