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디잔
북디자이너 장 디잔.
(장 디잔의 모습)
사시사철 가오리 스타일.
다리만 더 짧아 보이는 8부바지.
춘향이 곤장 맞은 머리.
사흘 굶은 괭이 낯짝.
지키는 것은 교통신호뿐!
믿는 것은 타로 점뿐!
그 외 모든 것에 반항하고
모든 것을 의심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 물고 술잔 빨던 20대는 갔다.
(20대의 장 디잔)
부어라~마셔라~ 내일은 없다~
인생도 짧고 예술은 더 짧아~~
(파리에 있는 장 디잔)
같은 모습에 빵떡모자를 쓰고 화통과 나란히 멘 바게트 빵. 뒤로 에펠탑.
짧았던 20대 후반의 모험. 파리 18구의 추억.
범처럼 일하던 30대도 갔다.
(30대의 장 디잔)
표지 하나에도 스토리가 있어야 해!!!
내지 한 장에도 혼이 스며야 해!!!!
당신의 직업은?
[장] “북 디자이너.”
[무식한 일반인] 그게 뭔데? 책이 네모나지 디자인할 게 뭐 있어?
[머리가 메두사처럼 변한 장] 갈아 마실 테다! 씹어 먹을 테다! 넌 네게 모욕감을 줬어!
[메두사 머리를 다시 묶으며] 니들이 이 세계를 알아? 니들이 이 바닥을 알아? 니들이 책을 알아?
한때는 그토록 얽매이기 싫었건만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었건만
지금은...
십수 년 동안 출판사 이름과
직급만 바뀌었을 뿐
멍청한 대표와
(김 대표의 모습)
멍청한 편집장만
(홍 편집 모습)
바뀌었을 뿐
아귀다툼하는 일상은 똑같다.
이 인생은 끝없는
지명전
치사한
방어전의 연속
내 인생의 타이틀매치는 언제?
나도 강호로 나가 겨루고 싶다
여기는 아냐.
니들은 모르겠지만
나도 옛날에는 황야를 달리던 들개였어.
디자인세계를 씹어 먹을 이빨이었어.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옛날 어떤 음식점에 어떤 주방장이 있었다.
주인이 얄미워 주인 망하라고
고기를 뭉텅뭉텅 썰어 넣기 시작했다.
구슬땀을 흘리며
죽어라고 매일매일 고기를 썰었다.
그런데 하루하루 손님이 늘더니 날마다 문전성시.
결국 주방장은 울며 붙잡는 주인을 뿌리치고
음식점을 떠난다.
(장 디잔의 사악한 미소)
흐흐흐! 그래, 그거야.
그래서 어느 날
몇 년 묵은 울분을 담아서
홧김에, 미친 듯이, 시안을 잡았다!
다섯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하나같이 주옥같았다.
(눈이 둥그레진 대표와 편집장 앞에서 미친 포스로 설명하는 장 디잔)
[장 디잔] 표지는 금박! 속표지마다 접지! 삽화는 무조건 팝업! 여기도 별색! 저기도 별색!
기염을 토하는 지랄발광. 말릴 수 있으면 말려봐!
[대표] “제작비는?”
[장] “제작비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루저!!!”
[홍 편집] “저기, 텍스트부터 앉혀보고...”
[장] “글쟁이는 빠져!!!”
[대표] “그래... 한 번 진행해봐...”
(이번에는 장 디잔의 눈이 둥그레진다)
[장] “정말요?”
그 책이 대박나고
(기자와 인터뷰하는 대표)
[대표] “우리 출판문화의 고급화를 위해... 종이책은 죽지 않는다...
책도 오브제, 책도 수집품... 어쩌고 저쩌고...
선도자적 고통을 감수하고... 나불나불...”
[대표가 장에게] “근데 자기야, 담부턴 그러지마? 나 떨렸어.”
(장의 씁쓸한 미소)
[장 생각] ‘그래, 나도 떠날 때가 온 거야.’
(장, 책상에 앉아서 멍하니 펜마우스를 두드린다)
언제까지 월급쟁이 하겠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걸로 길고 가늘게 가려면
그래도 회사에서 아쉬워할 때
떠나는 게...
일 년이라도 젊었을 때
독립해서
자리 잡는 게...
[장의 상상]
카트에 모니터, 프린터, 노트북, 책, 외장하드, 화분 등
물건을 잔뜩 싣고 휘파람 불며 나온다.
이건 자비로 산 거.
이건 못 받는 퇴직금 대신.
이건 회사가 경비처리 빼먹은 앙갚음.
몽땅 내꺼.
나도 <퐈이트클럽>의 에드워드 노튼처럼 때려친다.
격렬하게
잔인하게
그동안 대표의 막판뒤집기에 피폐해진 내 영혼!
제작비 타령에 희미해진 내 창의성!
끝없는 수정사항에 걸레가 된 내 성격!
(장, 갑자기 이를 갈며 펜마우스를 칼처럼 움켜잡는다.)
(어느새 옆에 와 있던 홍 편집, 놀라서 뒷걸음)
[홍] “왜, 왜, 그래요?”
(장, 의자를 홱 돌린다)
[장] “또 왜 왔어!”
[홍] “빵 드시라고요... 작가가 빵 사왔길래...”
(장, 다시 의자를 돌려 앉는다. 아련한 미소.)
그래 뭐
항상 나쁘지는 않았어.
그리울 때도 있을 거야.
.
.
.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