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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Apr 13. 2022

04_폰트 전쟁

백 과장


(tumblr.com)



햇살 가득한 캔틴.

떠도는 먼지마저 평화롭다. 

제발 이 평화가 오래 가길. 

오늘도 무사하길. 


회사가 새로 들인 커피머신을 뜯어보는 백.     

나쁘지 않아. 있어 보여. 

나는 사이트에서 골병 드는데 

본사는 이런 데서 커피 뽑아먹고 있었다 이거지. 

좋아, 나도 뽑아먹어 주겠어. 

열심히 축내주겠어. 


[이 이사] (벌컥 들어와서) “백 과장! 프로젝트 끝나고 심하지?”

[백] ‘....?’

[이사] “제안서 있어, 제안 PM 맡아.” (벌컥 나간다.) 

[백] “멤버는 제가 정해요?”

[이사] “<돌아온 제5전선>이야? 멤버는 뭘 제가 정해?”

[벡 생각] ‘<미션 임파서블>이겠지. 구세대...’

[백] “마침 본사 복귀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왕이면...”

[이사] “할 거야, 말 거야?”

[백] “해야죠.”

[이사] “그래, 월급 값 해봐.”

[백 생각] ‘월급 값만 하면 돼?’   



  

(백 과장 포함 3-4명 둘러앉은 회의실)

[백] “자료는 다 읽었지? TOC 잡아봅시다.”

[대니 오] “스코프부터 잡아야 하지 않나요?”

[백, 썩은 표정] “그게 그 얘기야.”

[대니 오] “그래요?”

[백, 더 썩은 표정] “그래.”

[백 생각] ‘착하자, 착하자. 나는 착할 수 있다.’

[백] “미팅로그 잘 기록해? 요점만? 응?” 생긋.

[대니 오] “오케이.”   

  

(회의실 문 벌컥)

[이사] “어프로치 쪽은 조 부장이 봐주겠대. 좋지?”

[백, 생각] ‘제길슨... 층층시하 돋네.’

[이사] “좋지?”

[백] “뭐가요?”

[이사]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지?”

[백] “그러게요. 하하. 아쉬운 건 졸병이었는데 장군님이 오셨네요, 하하하.”

영혼 없는 웃음.

 


    

[백, 제안서 내밀며] “부장님. 봐주세요.”

[부장, 입사 1개월 차. 외국계 싱크탱크 출신. 융통성 제로. 아는 것은 깊고도 좁음.]

[부장] “여기 원래 제안서 이렇게 써?”

[백 생각] ‘그렇다면?’

[백] “뭐가요?”

[부장] “돋움체 써?”

[백] “네. 돋움체. 본문은 12폰트. 제목은 18폰트. 그래프는 하늘색과 회색.”

[부장] “그게 좋아?”

[백] “좋으나마나...”

[부장] “돋움체 12폰트, 촌스럽지 않아?”

[백] “촌스러워도...”

[부장] “우리, 이렇게 합시다. 돋움 11폰트.”

[백 생각] '옘병, 돋움체나 돋움이나...’ 

[백] “이사님이 정하신 거라..”.

[부장] “내 식대로 합시다. 나 이거 못 보겠어. 눈에 안 들어와.”

[백 생각] ‘롸??’ 

    



(백 과장 포함 3-4명 둘러앉은 회의실)

[백] “오 대리님, 통합해서 보냈죠?”

[대니 오] “Yo!”     


(회의실 문 벌컥)

[이사] “뭐야! 폰트가 왜 이래!”

[백] 뜨끔. “네?”

[이사] “누구야! 통합한 사람 누구야!”

[대니 오] “백 과장님이...”

[백] “조 부장님이...”

[이사] “고쳐!”

[백] “이사님, 내용은 어떠...”

[이사] “몰라! 일단 폰트 고쳐와!”     


[백 생각] ‘옘병, 둘이 맞장을 뜨시든가...’     




(백, 제안서 폰트를 고쳐가며 부장과 이사 사이를 왔다갔다.)

돋움체 12폰트 --> 이사 --> 돋움 11폰트 --> 부장     


[부장, 거만하게 제안서 내밀며] “좋아요. 이사님께 최종본 보내요.”

     

(야심한 밤.

모두 퇴근하고 컴컴한 사무실에서 노트북 켜고 몰래 폰트 고치는 백)

돋움 11폰트 --> 돋움체 12폰트

이 야밤에 이 짓거리 하고 자빠졌다.

착한 사람 눈에는 구분도 안 된다는 돋움과 돋움체.

벌어먹고 살기 지랄 같다.     


(노트북 청색광에 유령처럼 빛나는 백의 얼굴)

시발류... 제길슨...   

   

(밤하늘이 까맣게 들어찬 거대한 창)

언젠가 써 주마.

사직서.

고딕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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