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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Feb 05. 2022

라면으로 TV 나온 썰 푼다

라면이라면-지영준

지금까지도 그때 느꼈던 맛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라면이 있다. 어린 시절, 병설 유치원에서 운영하는 종일반에 다닌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부모님이 맞벌이는 아니셨기에 환경적인 이유보다는 단순히 친구와 더 놀고 싶은 마음으로 엄마를 졸라 신청했던 것 같다. 종일반 아이들에겐 맛있는 간식이 제공되었는데, 어느 날 식탁 위에 흰 스티로폼 그릇이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 위에 얇은 면발이 둥글게 뭉쳐 있었고, 나는 포크 혹은 젓가락으로 풀어헤친 면 몇 가닥을 들어 올려 입에 넣었다. 국물이 잘 스며든 꼬들꼬들한 면을 오물거리자 짭짤하고 자극적인 맛이 혀 전체를 둘러쌌다. 인생 7년 차에 라면의 맛을 제대로 알아버린 것이다. 그날의 간식은 내 기억으로 최초의 컵라면이자 최애 컵라면이 된 육개장 사발면이었다.


여기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작가가 있다. 지영준 작가는 유치원에 다닐 즈음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의 방학 근무에 종종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다른 선생님들과 식사를 하곤 했는데,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음식이 육개장 사발면이었다. 가끔 봉지 라면을 먹어 본 적은 있지만 컵라면은 그날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맛의 기억은 나와 조금 달랐지만 그에게도 잊을 수 없는 맛을 경험한 날이었다.


<라면이라면>은 이 이야기와 함께 작가가 '세상의 모든 라면을 먹어 보고 글로 소개해보자'는 꿈을 가지계 된 계기와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이 모두 담겨 있는 에세이집이다. 그는 평소에도 라면을 좋아하긴 했지만 진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입대 후 PX에서였다. 군 생활의 지루함을 달래보고자 'PX에 있는 라면을 다 먹어보자'는 목표를 세운 그는 문득 국내, 더 나아가 세상에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라면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삶의 전환점이 될 목표를 품게 했다.


그는 군대에서 먹어 본 라면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고 제대 후엔 국내, 해외 라면을 먹어보며 게시물을 꾸준히 업로드했다. '라면 완전정복'이란 이름답게 해당 라면의 맛 평가뿐 아니라 카테고리별로 어울리는 라면들 추천하기, 짜파구리처럼 서로 다른 종류의 라면을 섞어 만든 퓨전 라면 레시피, 라면의 역사 같은 정보성 글 등 라면에 관한 모든 것을 올렸다. 게시물이 많아질수록 구독자수는 늘어났다. 이후 그는 생각지도 못한 방송 출연과 인터뷰 제안을 받았고, 지금처럼 책도 출간하는 유명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나비효과의 정석'이었다.


그의 시작은 전혀 거창하지 않았다. 지루한 군 생활에 활력소를 불어넣고자 떠오른 작은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하지만 그 작은 날갯짓이 수차례 반복되자, 다양한 길이 열렸다. 매번 느끼지만 실행력과 꾸준함을 이길 능력은 없다. 요즘 인스타그램, 블로그, 브런치에 책과 관련된 글을 꾸준히 올리는 중인데, 아직 구독자수가 많진 않지만(그래서 지금의 구독자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 구독자 수가 1000명인 계정과 10명인 계정에 구독을 누르는 마음은 다르니까) 계속 올리다 보면 알아주실 분들이 많을 거라 믿는다.


처음엔 제목과 표지만 보고 여러 종류의 라면 소개가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 내용이 아예 없진 않지만 '좋아하는 라면으로 자신만의 성공을 이루는 여정'이 주를 이루는 책이다. 진짜 라면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들은 저자의 다른 책 '라면 완전정복'을 읽어보기 바란다. 거기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라면 말고도 생소한 종류의 라면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라면이라면>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필력'이다.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진 않았지만 정갈하지 않은 문체와 뚝뚝 끊어지는 문장 연결성은 독자의 몰입감을 흩뜨려놓았다. 작품이라기보단 누군가의 긴 일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다음에도 책 출간 제의를 받으면 문장을 좀 더 다듬어서 탈고하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을 통해 내가 깨달은 부분도 있다. 글솜씨가 좋지 않아도 작가의 스토리가 탄탄하고 진정성을 갖추고 있다면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라면으로 자신의 꿈을 이룬 그의 성공 썰이 궁금하다면 나처럼 라면과 함께 가볍게 후루룩 읽기 좋은 책이다.




p. 29-30

40킬로미터 행군 중에 먹은, 덜 익은 라면 한 젓가락은 오직 명문대를 들어가기 위하여 살아온 몇 년간의 세월을 반성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에 앞으로는 그런 큰 꿈이 아니라, 내 주변의 소박한 행복을 돌아보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p. 43

그러나 군 생활이 끝나지 않은 휴가 중에 하는 리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상황이 오더라도 그 꿈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 159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남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가지고 도전한 제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분들이 일상의 작고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자신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깨우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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