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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Feb 04. 2022

임신 극사실주의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송해나

"엄마, 나 낳을 때 많이 아팠어?"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아팠지. 그런데 네가 태어난 순간 그 고통은 기억도 안 나."


가끔 엄마에게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한결같다. 자식 입장에선 뭉클해지는 말이지만 동시에 겁도 났다. 만약 원해서 아이를 가진다 해도, 내가 하늘이 노래질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참아낼 수 있을까? 엄마는 배꼽을 시작으로 아랫배까지 긴 흉터를 가지고 있다.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나와 달리, 네 살 터울의 이란성쌍둥이 동생은 제왕절개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요즘은 의료기술이 좋아 팬티라인을 따라 최대한 티 안 나게 수술하지만 그 당시엔 가로 방향으로 수술해 눈에 띄는 긴 자국을 남겼다. 엄마 배를 볼 때면 겪어보지 않아도 출산의 고통이 생생하게 다가와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든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임신 10개월 간의 고통도 그와 못지않다는 것을. 아직 이르긴 하지만 20대 후반에 막 접어들면서 결혼과 임신에 대해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3년 사귄 남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닮은 아기가 태어나면 사랑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서점에 들러 에세이 매대를 구경하던 중 솔직한 임신 경험을 보여줄 것 같은 표지를 보고, 이 책을 골라왔다.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는 강렬한 제목답게 송해나 작가가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뜬 순간부터 고통스럽게 출산하는 과정까지, 임신 과정 전부를 일기 형식으로 트위터에 올렸던 게시물 모음집이다. 그녀는 남편과 계획적인 임신에 성공했지만 10개월의 고통을 버티면서 '그동안 임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가는 드라마와 전혀 다른 입덧 증상, 태동을 단순히 아기의 귀여운 움직임으로만 생각했는데 잠 못 이룰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경험, 주변인들의 무례한 말과 행동, 출산장려정책의 허점 등을 통해 임신에 대해 가지는 사회 통념과 은폐된 진실을 모두 세상에 폭로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거의 매일 자신의 상태와 일상에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적어 내려갔다. 트위터엔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줄 몰랐다. '작가가 몸이 약한 편이라 증상이 남들보다 심한 게 아니었을까?'란 생각에 객관성을 위해 다른 임산부들의 경험도 조사해보았다. 버틸만했다는 경우보다 아이를 더 이상 가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내내 일그러졌다.


더 큰 문제는 사회의 미성숙한 인식이었다. 부끄럽지만 거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신 초기엔 배가 나오지 않으니 입덧 외엔 다른 증상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임신 후기보다 더 힘들었다. 드라마에선 식욕이 돋아 남편에게 뱃속의 아기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부탁하던데, 현실은 계속되는 입덧으로 먹는 즐거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입덧에도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음식물이 들어가면 토하는 토덧, 반대로 속이 비면 울렁거리는 먹덧, 침만 삼켜도 구역질이 나는 침덧, 심지어 양치만 해도 메스꺼워지는 양치덧도 있다.


요즘 저녁만 되면 구토를 한다. 그렇게 밤새 토하다 아침이 되면 실신 상태가 된다. 일상생활이 가능할 리 없다. 결근을 종종 하다가 오랜만에 회사에서 그 동료를 만났다. 안부를 묻기에 이렇게 토하고 실신하며 지냈다 하니 그래도 입덧은 없어서 다행이라며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다. 그는 이게 입덧인 줄 모른다.

임신 초기엔 입덧 외에도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정말 괴로운 건 예전처럼 약을 복용하거나 여러 검사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화학물이나 방사선에 의해 아기가 기형으로 태어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통증을 그대로 느껴야 하고, 진료를 받아도 피검사와 같은 기본적인 검사가 전부다. 작가는 심한 가슴 통증에 응급실에 내원했지만 의료진에게 임산부라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내용의 답변이 돌아왔다. 평소 통증에 예민한 편인 나는, 임신은 고귀하고 아름답기는 커녕 고통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하철엔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이 있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비임산부가 앉아 있다. 그녀는 임산부 배지를 잘 보이게 매달아 놓았지만, 그들은 못 본 체 휴대폰만 만지고 있다. 그나마 중, 후기 임산부들은 배를 보고 양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초기의 경우 겉으로 티가 잘 나지 않기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 시 불편한 일이 많다고 한다. '임신이 대수냐?'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경멸스럽다.


우리의 분노는 또다시 국가를 향할 수밖에 없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책에서 등장한 것들 중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근로시간 단축 제도'이다. 임신 기간 동안 한, 두 시간 일찍 퇴근할 수 있는 제도이다. 하지만 여기엔 허점이 있다. 업무량은 그대로라는 것. 작가는 동일한 업무량을 전보다 일찍 끝내기 위해 더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그럼에도 회사 내에서 눈치를 봐야 했다.


동료들은 네 시 이후의 내 공백을 불편해하고, 벌써부터 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의 대체근무자가 될까 걱정한다. 우리 회사는 육아휴직자의 대체근무자를 신규로 채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심한 동료들을 원망하게 만드는 건 결국 시스템의 문제다. 제도의 올바른 정착 없이 '저출산' 극복? 그런 건 없다.

두 번째는 '바우처 카드'이다. 2018년을 기준으로, 임신이 확인된 시점부터 출산까지 산과 진료를 수행하는 병원에서 50만 원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정기검진부터 기형아 검사까지, 수많은 병원비에 비해 50만 원은 택도 없다. 임신 초기에 다 써 버린다. 나는 양육비만 걱정했는데, 임신 과정에 이렇게 돈이 많이 나가는 줄 몰랐다. 다행히 검색해 보니 지원 비용이 조금씩 높아져 올해부턴 200만 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써버린 400조 원은 출생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재 통계청에 따른 합계출산율은 약 0.83명에 불과하다. 그래프는 꾸준히 하락 중이다.


임신의 찐 모습을 보고 남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딩크 부부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아." 그는 내가 보낸 이 책을 읽고 느꼈던 감상평을 꼼꼼히 읽은 후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표출했다. "임신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너에게 있지만 나는 널 닮은 아기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아직 먼 미래니까 다음에 차근히 다시 생각해 봐도 될까?"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한 권으로 임신의 고통을 일반화하면 안 되지만 이제껏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은폐했던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내 주어 고마웠다. 앞으로 이런 파장이 계속되어 학교에서 올바른 성교육이 진행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근본적인 정책 마련이 현실화되어 임산부와 주양육자에게 더 나은 환경이 마련되길 바란다.




p. 141

여느 날처럼 임산부배려석 앞에 섰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내 배지를 봤지만 모르는 척 계속 스마트폰만 보더라. 고개를 돌려 숨 한 번 길게 내쉬고 혹시 임산부냐 물으니 "임산부요? 아닌데요?" 하며 계속 스마트폰을 봤다. 다시 불러 제가 임산부인데 좀 앉아도 되겠느냐 물으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러세요..." 했다. 모욕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를 지키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p. 191

회사에 일이 많은 시기라 요즘 사무실엔 늦은 밤이나 주말까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근로기준법 제74조에 따르면 임산부의 시간외근로는 금지이기 때문에 임산부는 정시퇴근을 보장받지만 동료들에게 미움받는 거까지는 보호받지 못한다. 여기에 휴직 후 내 업무를 이어받는 걸 누가 달가워할까.


p. 295

이런 고통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매분 지옥의 수레바퀴를 도는 기분이었다. 자궁이 이완하는 1분 동안은 실신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뺨을 때리며 버텼다. 그렇개 수시간 진통을 겪으니 자궁 입구가 4센티미터쯤 열렸고 그제야 척추에 관을 꽂아 무통주사라 불리는 경막외마취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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