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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Feb 10. 2022

표지에 속지 마세요

취향의 발견-이봉호

단언컨대, 단순히 어그로를 끌기 위한 제목이 아니다. 표지만 봤을 땐 젊은 작가가 쓴 가볍게 읽기 좋은 에세이집 정도로 생각했다. 12명의 다양한 취향이 궁금해서지, 높은 문장력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50대의 중년이었고, 작가인 동시에 대중문화평론가로 활동 중이었다.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짙은 필력의 문장들은 나를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고급진 어휘들이 연이어 등장할 때마다 읽는 것을 중단하고 초록창을 들락거렸고 덕분에 예전에 그만두었던 어휘 노트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작가 본인을 포함한 12명의 취향 저격자들에 대한 개인적 견해가 성숙한 어휘들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표지를 바꾸었으면.


내게 영감을 잔뜩 준 책이라 너무 흥분해버렸다. <취향의 발견>은 독서에 미쳐 있는 이봉호 작가가 자신과 그의 지인들 11명이 각자 심취해 있는 취향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외에도 LP 수집, 마라톤, 공포영화 등 궁금해지는 취향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을 보며 독서에 대한 나의 애정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작가는 12가지의 취향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자신만의 단단한 취향을 가진 이에 대해서 편견을 가진 사회는 위험하다. 오로지 평균치의 정서와 인성, 폭력적인 문화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편견사회에서 취향의 다양성이란 탄압이나 차별의 대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고루하고 건조한 평균치의 인간만이 득세하는 비극이 연출된다. 장담컨대 취향을 무시하는 사회에게 미래란 없다.

한때 '덕후'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다. 사전적 정의로는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어느 한 분야에 미쳐 있는 사회 부적응자'로 재해석되며 부정적인 냄새를 풍겼다. 다행히도 최근엔 사회적 인식이 나아지면서 본래 뜻으로 일부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덕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다. 비주류, 즉 마이너한 분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덕질은 그 사람만의 취향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그러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만화를 좋아하던 공포영화나 책을 좋아하던 아무 상관없다. 오히려 무언갈 뚜렷이 좋아해 그 분야를 깊게 파다 보면 성공할 확률도 높아진다. 그러니 자신의 취향에, 남들의 취향에 부끄러워하지 말자.


<취향의 발견>에서 소개하는 12가지의 취향 모두 매력적이었지만 그중 유독 내 눈을 끌었던 취향 3가지를 골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이봉호 작가의 '책 덕질'이다. 그는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한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년 200~300권의 책을 읽어왔고 집에 소장 중인 책은 무려 3천여 권에 이른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폐기한 것까지 합치면 6천 권 정도다. 정독이 아닌 속독을 주로 해서 그 수치가 나온 거겠지만 직장생활과 병행하며 읽은 거라 생각하면 어마 무시한 양이다. 나름 독서광이라 자부했는데, 그가 황새라면 난 뱁새 수준이었다. 그의 높은 문장 구사력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사람이란 딱 읽은 만큼만 세상을 본다.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식견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정답을 가둬놓고 먼 길을 돌아가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독서에 있다. 양서니 악서니 하는 구분도 책을 접해야만 가능하다. 독서 없이 변화와 가치를 논하는 것은 지독한 난센스다.

독서만큼은 꼭 공통 취미가 되길 바라는 나로선, 이 문단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실제로 나는 저 경험을 하고 있다. 책으로 대학 전공만으로 먹고 살 필요가 없다는 사실과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괜찮다는 신념이 생겼다. 재미있게도 작가는 독서의 장점만 나열하지 않는다. 세 가지 단점을 언급하는데, 번잡한 생각과 육체적 건강 악화, 낮은 돈벌이가 그것이다. 단기적으로 볼 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린 멀리 봐야 한다. 직관적인 결과로 볼 때 독서는 자본생산성이 최하위지만, 책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인생의 방향성을 잡다 보면 자신만의 성공을 이루는 데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번잡한 생각 덕분에 진로를 선택할 수 있고 육체적인 건강을 염려한다면 독서 시간이 작은 부분을 운동에 투자하면 된다. 결론은 책을 읽어야 한다.


나와 같은 취향을 만나 반가웠다면 이젠 전혀 다른 취향의 신비감을 느껴볼 차례다. 네 번째 취향저격자 김수진은 공포영화 마니아다. 6년 간 1000여 편의 공포영화를 섭렵했다. 그녀는 극장에서 흥행했던 영화뿐 아니라 B급 감성의 영화도 잔뜩 다운로드하여 본다. 그녀는 고전으로 엑소시스트를 꼽았으며 '조지 로메로'라는 영화감독을 알게 된 후 그의 모든 좀비물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 무서운 영화를 잘 못 봐서 시도해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생각해 볼만한 점은 그녀가 공포영화의 기준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귀신이나 좀비가 나오지 않는 영화에서도 그녀는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2018년에 개봉했던 <국가 부도의 날>이다. IMF 사태를 직접 경험했던 김수진은 친구의 부모가 파산신청하는 걸 보며 무력감에 빠졌다고 한다. 어쩌면 귀신이나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보다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공포의 여운이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마지막은 코케인이라는 LP 바를 운영 중인 최우식이다. 가장 언급하고 싶었던 인물인데 그는 엄청난 필력을 자랑하는 블로거로 활동했었다. 블로그엔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코케인의 일상을 주로 담은 글이 올라와 있는데, 나는 이봉호 작가가 그의 블로그에서 발췌한 글을 읽고 오랜만에 벅차오를 만큼의 문학적 쾌감을 느꼈다. 문장을 통해 그의 무수한 생의 경험이 떠올랐고,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르고 골라 생을 관통하는 명문장 몇 개를 소개하려 한다.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삶을 위해서라고 말하면 조금 거창하고 그저 대열에서 조금 벗어나 길가의 돌멩이를 톡톡 걷어차며 조금 한적하게 걷고 싶을 뿐이었다. 경주마의 안대를 붙이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인생이란 철 지난 옷을 입고 비 오는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나는 생에 대하여 단거리 주자도 장거리 주자도 아니었지만, 때로는 하염없이 전력 질주해야 했고 때로는 터벅터벅 신발을 끌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소실점이 사라진 그림처럼 원근은 모호했으며 결승점은 언제나 언덕 너머에 있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좋은 문장을 만나니 자연스레 좋은 문장과 영감이 떠올랐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노트북 터치패드에 손가락을 스칠 때마다 왜 작가란 직업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연륜이 담긴 글은 나를 나이 들고 싶게 했다. 비 오는 날 코케인 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홀짝여봐야겠다.


아직 뚜렷한 취향이 없다면 12가지 취향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기회를, 이미 가지고 있다면 다른 취향에도 기웃거릴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취향의 발견>으로 나라는 사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p. 57

정신과 육체는 철저하게 분리된 영역이라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안하지만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육체 기능이 무너진 자는 매사에 정신 줄을 놓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반대로 정신이 피폐해진 자는 온전한 육체 기능을 영위하기기 어렵다. 따라서 정신과 육체는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점을 공유하는 관계다.


p. 152

모든 학습에는 '이것저것'이 최고다. 여기서 이것저것이란 교육방식의 다원화를 뜻한다. 바둑 역시 여러 방법을 한꺼번에 시도하는 게 효과가 좋다. 난 바둑책과 신문에 나온 기보를 보거나 암기하면서 이론을 흡수하고, 바둑방송을 보고 들으면서 시야를 넓히고, 바둑을 두면서 실전 감각을 길렀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실전이다. 권투연습장에서 아무리 샌드백을 두드려도 링 위에 올라가서 때리고 맞아봐야 실력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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