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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Mar 21. 2022

이보다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빈센트 나의 빈센트-정여울/닥터 후 5-10 스포

내가 빈센트 반 고흐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건 왓챠에서 방영한 영국 드라마 "닥터 후"의 한 에피소드 때문이었다. 주인공 닥터가 시간 여행을 하며 지구를 지켜내는 스토리이며, 시즌 5의 10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빈센트의 삶을 사실에 근거한 감동을 침해하지 않은 채 흥미롭게 각색하여 다루고 있다. 작중 고흐는 식당에서 값을 지불하지 못해 자신의 그림을 대신 받아달라고 하지만(저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넙죽 받아, 얼른!"이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내쫓기에 급급했다. 당시 빈센트만의 독특한 그림 기법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를 미치광이로만 생각하는 몰인정한 사람들과 세상 때문에 빈센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작품에 등장한 침대와 꼭 닮은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내 마음을 오래도록 시리게 했다. 하지만 결말을 보면서 이내 슬픔의 눈물이 환희의 눈물로 뒤바뀌었다. 시간 여행자답게 닥터는 빈센트와 함께 현실로 돌아와,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 개인전으로 그를 데려갔다. 축 처진 어깨로 우물쭈물 벽에 걸린 자신의 작품들을 쳐다보는 모습에 나는 창문에 흐르는 빗물처럼 눈물을 오래도록 쏟아내야 했다. 이 감동적인 결말은 내가 빈센트의 삶을 사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빈센트와 관련된 영상은 모조리 찾아보게 되었고 그의 작품이 그려진 각종 굿즈를 구매할 만큼 팬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내가 명함도 못 내미는 사람을 만났다. 정여울 작가는 10년 내내 빈센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 나선 골수팬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임에도 그가 조금이라도 발자취를 남겼던 곳이라면 목적지로 설정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빈센트 나의 빈센트>에서 이러한 여정의 흔적을 담아 빈센트의 삶과 작품의 매력을 독자들에게 뜨겁게 전달했다. 책 속엔 빈센트 반 고흐만이 가진 독특한 그림 기법, 그 작품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평과 작품 속 담긴 이야기,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대거 등장한다. 덕분에 빈센트를 향한 나의 마음과 배경지식이 방대해졌다.


빈센트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수적인 부모님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들었던 동생들과 달리 장남인 그는 늘 바깥세상을 궁금해했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보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했다. 부모님은 이런 아들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지쳐갔고 결국 그를 방치해 버렸다. 부모님의 사랑을 얻지 못한 빈센트는 오랜 방황 끝에 평생을 화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면에 귀 기울이는 삶은 너무도 험난했다.


능력 있는 미술상이자 가족 중 유일하게 그의 길을 응원했던 남동생 테오의 금전적 지원을 받으며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빈센트의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특유의 반사회적인 성격 탓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만 늘어갔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어린 시절 가족애의 결핍과 합쳐지며 평생토록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화가로써의 열정은 좀체 사그라들지 않아서 목사를 포기하고 화가를 선택한 스물일곱부터 생을 마감한 서른일곱의 나이까지 무려 1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이토록 순수한 열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책에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빈센트의 여린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 특히 폴 고갱과의 합숙 기간은 그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음에도 얼마나 사람을 그리워했는지를 깨닫게 했다. 빈센트는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폴 고갱이 유일했다. 빈센트와 달리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응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속내를 전혀 몰랐던 빈센트는 자신의 노란 방을 예쁘게 꾸미면서 그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합숙 생활 초반엔 즐거웠지만 결국 몇 달만에 성격 차이로 폴 고갱은 그를 떠나고 말았다. 빈센트는 그마저 소통이 불가능하자 귀를 자르고 말았다.


사실 빈센트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피하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낼 경우 이를 수용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옹호했다.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가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를 평생 사랑했던 테오조차 형을 멀리하고 싶을 때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불안감을 분신처럼 데리고 다닌 그의 일생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빈센트를 미워하기는 힘들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가족과 연인, 친구, 이웃들에게 상처만 받아왔기에 사랑받는 법을 알지 못했고, 자연스레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외로움을 떨쳐내고자 하는 그의 처절한 사랑의 광기는 독자들의 마음을 절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정여울 작가의 빈센트를 향한 러브레터, <빈센트 나의 빈센트>는 작품 설명도 애정을 담뿍 담아 소개하는데, 대표작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자주 접해보지 못했던 그림들도 다수 등장한다. 그녀가 빈센트 반 고흐 전문 큐레이터처럼 정보와 사심을 담아 설명해준 덕분에 빈센트만이 가진 보색의 색채 대비가 강렬하고 입체적인 그림 기법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작품마다 담긴 그의 인생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겉핥기식 감상을 내려놓고 경건하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가의 말처럼 "'너는 절대 안 된다'는 세상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맞섰던" 빈센트. 동생 테오만이 그를 영원히 사랑했지만 그는 그림과 자연과 사람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예술가이다. 이토록 순수한 열정을 가진 화가 덕분에 현실과 꿈 사이에서 갈팡질팡 할 때마다 나는 다시금 중심을 잡았다.




p. 32

빈센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위대한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작은 일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p. 39

"사람들이 모두 시궁창에 처박혀 있을 때도, 그중 몇 명은 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이 문장처럼, 빈센트는 모두가 '어둠'만을 바라볼 때도 '빛'을 발견해내는 사람이었다. 빈센트가 그린 밤하늘의 별이 감동을 주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검은색'이 없기 때문이다. 밝은 빛에 익숙해진 시선으로 어둠을 바라보면, 어둠은 순간적으로 짙은 까만색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둠의 첫인상일 뿐이다. 어둠 속에서도 무수한 빛의 스펙트럼이 있다. 빈센트는 어둠 속에 빛나는 찬란한 무지개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p. 349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10년만 더 젊었을 때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열정적으로 이 일에 전념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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