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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Apr 10. 2024

2. 부부싸움

술, 담배, 텔레비전

 초등학교 고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2년 정도 다녔다. 문득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해당 곡의 악보에 연필로 체크 표시를 남기며 열심히 건반을 두드렸지만 실재하는 나의 집은 전혀 즐겁지 않았는데도.




 하교 후 집에 돌아갈 때면 늘 긴장이 되었다. '아빠가 지금 집에 있을까?', '이제 둘이 화해를 했으려나?', '오늘은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다', '욕 좀 그만했으면.' 교실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던 기억은 2층짜리 벽돌집에 다다르며 이런 생각들로 순식간에 잠식되어 버리고 만다. 검은색으로 페인트칠된 철문을 열고 계단을 오른 뒤  몸이 움츠러든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아빠 구두가 없으면 안심하고 중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나를 반기는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거렸다. 반대 상황일 경우에는 "다녀왔습니다" 인사 후 대충 옷을 갈아입고 내 방으로 쏙 들어갔다.


 높은 간수치로 강제 금주를 하기 전까지 그는 늘 술을 달고 살았다. 낮밤 할 것 없이 식사 때마다 소주를 곁들였다, 식사 메뉴, 아니 안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엌에 있는 엄마를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욕지거리를 했다. 아빠와 함께 식사를 하던 우리는 수저를 내려놓고 싶었지만 행여 불똥이 우리에게 튈까 체할 듯이 밥과 반찬을 욱여넣었다(훗날 내가 쉽게 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지면 그는 그릇을 잡히는 대로 바닥에 힘껏 던졌다. 크고 작은 그릇들이 비명을 지르며 뾰족한 조각들로 산산이 부서질 때 내 마음도 아리게 찢어졌다. 바닥에 국과 각종 반찬들이 널브러진 채 나와 동생들 사이로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나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몇십 분이 지난 뒤, 아빠는 제풀에 지친 듯 본인이 저지른 모든 행태를 방치한 채 중문을 세게 여닫고 담배를 피우러 마당으로 나갔다. 계단을 거칠게 내려가는 그의 발소리가 옅어지자 끔찍한 정적이 거실에 흘렀다. 불편한 공기는 오롯이 집에 남겨진 우리의 몫이 되었다.


 엄마는 우리가 유리 조각을 밟을까 봐 황급히 대피시킨다. 그러고는 울분하며 깨진 그릇을 신문지에 꽁꽁 싸맨다. 축축해진 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쓰레기가 된 반찬을 주워 담는다. 울먹이며 엄마의 등을 바라본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한다. '아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희만 다 크면 따로 살 거야."

  엄마의 똑같은 레퍼토리. 그녀가 미우면서도 너무 안쓰러워 함께 가장 욕을 실컷 한다. 그러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가까워지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방문을 닫고 게임을 하거나 학원 숙제에 몰두했다. 물론 그가 들어온 순간 바닥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밤이 되면 아빠의 목소리는 잦아들었지만 그 틈을 텔레비전 소리가 채웠다. 그는 늘 아내와 싸우고 나면 못 삭힌 분을 TV 볼륨으로 표현했다. '이 상황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의 뜻이겠지. 안방까지 명확하게 들려오는 소음으로 성장기였던 나는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베개가 짠물을 잔뜩 흡수할 즈음에야 기진맥진한 채 잠이 들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싸움의 여파가 잠잠해지면 엄마는 아빠를 위해 따뜻한 밥을 차려주었다. 그전까지 라면만 끓여 먹던 아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음식을 묵묵히 받아먹었다. 둘만의 이상한 화해방법이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당분간 욕설이 들리지 않겠구나', '이제 밤잠을 설치지 않고 마음 편히 잘 수 있겠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봐도 되겠다'라고 생각하며.




 서른에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엄마를 이해하기 어렵다. 결혼 후 그런 인간인 걸 알았으면서 왜 그의 유전자가 섞인 아이를 낳고 싶었는지,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왜 자녀 앞에서 남편과 싸우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주었는지, 울고 불며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왜 아직도 그와 이혼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산책 중에 엄마에게 무심코 물어봤다.

 "엄마, 우리가 그렇게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 왜 이혼 안 했어?"

 "지금은 이혼이 별거 아니지만 옛날에는 나쁜 소문도 돌고 주위에서 이혼녀라고 엄청 욕했어. 인식이 엄청 안 좋았거든."

 조금은 납득이 되면서도 서운한 감정이 잔잔한 파도처럼 몰려왔다. 아무리 시대상을 반영하더라도 결국 자녀보다 남의 시선에 더 신경을 쓴다는 의미니까.

 엄마는 몇 마디를 더 얹는다.

 "그리고 내 짧은 가방끈으로 너희 아빠만큼 어떻게 벌어. 계속 집안일만 해서 경력도 없고."

 나는 조금 피로해져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는 늘 엄마를 가스라이팅했다.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애들이나 잘 봐. 항상 이런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 보려고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언급했을 땐 펄쩍 뛰며 반대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싶다고 했을 땐 차도 안 몰 거면서 헛짓거리한다고 욕을 했다. 남동생이 화를 내며 설득하고서야 그녀는 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전하려면 항상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빠가 너무 괘씸했다. 엄마의 바깥 생활이 길어지면 자녀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집도 어수선해질 게 뻔하다고 말했다. 그 이면엔 그 일을 내가 떠맡기 싫다는 것이리라. 엄마는 생활 반경이 좁은 만큼 세상을 넓게 보지 못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제안하면 '내가 무슨...', '젊은 너희들이나 해.'라며 본인은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도 잘 몰랐다. 퇴근 후 친구들과 한 잔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아빠와 달리 비슷한 나이대의 엄마들과 친해지기 힘들었던 엄마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방에서 자녀들과 수다를 떠는 게 전부였다. 10대 시절의 나는 아빠를 미워했지만 아빠 없이는 살아갈 없었던 엄마가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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