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의 비밀을 아는 자에게
가장 높은 자가 추앙받는 세상에서는 가장 낮은 자가 멸시를 피할 길이 없다. 그 세상은 높은 자들과 나머지, 혹은 낮은 자들과 나머지로 설명되지 않는다. 높음이 없으면 낮음도 없고 추앙이 없으면 멸시도 없는 이항대립의 개념 쌍이다. 빌어먹을 높음과 낮음의 기준은 누가 만들었을까. 준거집단 속의 저들은 어떻게 했길래 높고 낮을까. 사람들은 이 맥락을 궁금해하지 않는 듯하다. 오로지 반응만, 추앙과 멸시만 있다. 멸시는 인간이 쉽게 무시하거나 버틸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타자의 시선에 민감하다면 더욱.
'진짜 그런가?' 하는 의심은 '사실 그런 것 같다'는 무의식적 동요로 이어진다. 이러한 신념체계의 변화를 추동하는 소름 끼치는 일은 언론이 독보적으로 잘한다. 아예 존재 자체를 특정 모습으로 규정한다. 여기에 열등감을 느끼는 자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다. 모두가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저 위로 올라가고 싶지. 이 글은 열등감을 동력으로 삼아 성취를 이루라는 개소리가 아니다. 왜 사다리 위로 올라가고 싶은지, 그전에 이 사다리는 누가 만들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는 얘기다. 대충 알아봤는데 납득이 되고 저 위에서 촘촘한 세상을 한눈에 보고 싶은 기대가 있다면 올라가면 된다. 반대로 사다리의 존재 이유를 모르겠고 위에서 휘청거릴 바에 아래에서 땅을 딛겠다고 생각하면 사다리를 치워 버리면 된다.
누가 더 높냐를 따지는 관습이 만연한 세계일수록 교만에 취해 사는 사람들이 많다. 웃기게도 교만은 열등감을 먹고 자란다. 엥, 우월감과 교만이 아니라? 교만은 자신을 높이 세우는 태도다. 자신의 존재가 다른 누구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으로 자신을 절대화하면서 타자를 업신여긴다. 그나마 뽐낼 만한 것들을 긁어모아 은근히 흘린다. 교만은 여러모로 위험하다. 이미 거기서부터 상대와 나를 나누고 있다는 거니까. 구분 없이 사랑할 기회를 아예 차단하니까.
처연한 방어기제라고 해두자. 쉽게 교만해질 수 있는 곳에서 작은 겸손을 구해본다. 겸손은 칭찬에 손사래 치는 여유를 넘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도 솔직하게 드러낼 용기가 아닐까. 자랑에 혈안이 된 곳에서 시시한 자랑거리 자체를 따르지 않을 용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