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있는 고교 동창회에서 매년 거행하던 산행 대신에, 연로하신 동문들을 위해 야유회로 바꾸어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에 한국에서 한 동문이 귀한 손님으로 오신단다. 주로 판화를 그리는 김봉준 화백께서 뉴욕에 왔는데, 나에게는 고교 5년 후배이지만, 만나보니 나이 탓일까, 누가 후배이고 누가 선배인지 언뜻 봐선, 구별이 잘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난 아직 젊다'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김 화백은 그림 이외에도 조선 기법의 붓글씨 전수자라고 한다. 그래서 동문들에게 붓글씨를 하나씩 써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가훈을 써 줄 터이니, 가훈을 알려달란다.
가훈? 그런 것 없이도 그동안 잘 살았었는데, 갑자기 가훈을 알려달라니? 그동안 '믿음, 소망, 사랑'을 가훈 삼아 살아왔었지만, 그것은 이미 집안 어딘가에 오래전부터 걸려 있는 것 같고... 해서, 그것 보담, 우리 집안만의 가풍을 엿볼 수 있는, 그리고 또 후손들에게도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런 단어로 정하면 좋을 것 같았다.
곰곰이 혼자 생각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한 단어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서 그럴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훈용의 한 단어를 찾기가, 아니, 압축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 모아놓고 이 숙제를 내놓았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앞서 언급한, '믿음, 소망, 사랑'에서 한 발자국도 더 못 나간다. 해서 한국에 있는 동생들에게도 물어보았다. 만일 우리 부모님께서 아직도 살아계시다면, 가훈을 어떻게 정하셨을 것 같냐고 물었는데, 한 동생만의 어려운 질문이라는 답변 밖에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해서, 부모님 말고, 한 대 더 위로 올라가서, 할아버님과 할머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사셨고, 또 후대에게는 어떤 당부를 하고 싶으셨을지를 가지고, 가훈을 정하는 것이 좋겠단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가훈을 새로 정하기보다는, 선조들의 가훈?을 발굴해서 찾아내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요즘 와서 내가 한 가지 후회되는 것이 있다. 연로하신 할머님을 우리 집에서 모시고 살았었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정신이 아주 맑으셨고 또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셨다. 시간이 있을 적마다 우리한테, 할머님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으셨던 그 옛날이야기를 끝도 없이 하셨다. 하루는 막내 숙부님께서 나에게 제안을 하나 하셨다. 연로하신 분이시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정정하셔서 저렇게 말씀하실 때, 그것을 녹음을 해두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셨다. 그런데...
당시 난, 학생이었고, 또 군인이었을 때였는데, 데이트하랴,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쁘게, 빨빨거리고 다니던 청춘의 그 황금 같은 시절에, 할머님한테 마이크 들이대고 녹음할 시간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나 자신도, (어휴~ 맨날 듣는 또 그 옛날이야기를...?)하며 숙부님의 제안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그래서, 지금은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내 바로 윗대분들, 부모님 세대는 모두 세상을 떠나신 지금엔, 더군다나 내가 전달받을만한 정보가 더 이상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라도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암튼, 내가 전에 들어 알고 있는 약간의 기억으로는, 할아버님의 그 윗분들은 쭈욱 논산에서 사시다가 어떤 이유인 줄은 모르지만, 부여로 옮겨 오셨단다. 당시 일제치하의 시절에 국민들 대다수가 소작농의 어려운 처지에서 살고 있기는 했었지만, 원래는 양반 집안이라고는 하면서, 어쩌다가 농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도 소작농의 어려운 처지가 되었는지는 나도 궁금하다.
당시 흉년의 해에는 보릿고개를 못 넘기면, 식구들이 모두 굶어 죽는 그런 시절에, 소작농이셨던 할아버님은, 자기의 곡식을 풀어서 동네 사람들을 먹여 살리셨단다. 바로 위아랫집으로 김종필씨네가 있었는데, 그 집은 아들을 8명을 두고 있었고, 우리 집안은 아들 5명에다가, 할아버님의 형제분(타계하셔서)의 두 아들까지 데려다 키우셨으니, 모두 사내아이만 7명이었다. 게다가 두 집안의 아이들의 나이가 엇비슷했으니, 안 봐도 아마도 동네가 시끌시끌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종필네는 자기 땅도 있었고, 부자였는데도 곡식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없고, 우리 집안에서 곡식을 풀어서 춘궁기의 위기를 넘겼단다.
할아버님은 평소에 얼마나 부지런하셨던지, 소작농이면서도 많은 소출을 내셨고, 데리고 있는 하인(집안에 하인들도 데리고 있으셨단다)이 시원찮게 일하고 있으면, 할아버님이 뛰어들어 직접 해치우곤 하시는 그런 성격이셨단다. 그런데, 우리 아버님이 7살 때에, 할아버님께서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단다. 먼, 훗날, 동네 어르신들이 춘궁기의 그 일을 기억하고, 할아버님께 고마움의 표시로 마을 입구에 공덕비를 세웠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집안이 갑자기 어렵게 되면서, 할머님께서는 나의 두 고모까지 모두 9명의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큰 장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인근 마을의 5일장을 돌아다니시며 장사를 해서 자식들을 모두 키워내셨다. 그래서 할머님의 머리 윗부분은 무거운 것을 이어 나르시느라 납작하게 되셨고, 말년에는 걸음도 못 걷게 되시어 앉은뱅이로 지내시게 되었다.
동네에서 유지이셨던, 방앗간 집에서 어린 나이 때부터 똑똑했던 우리 아버님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어 일본 유학을 보내주었단다. 일본에 가셔서는 김종필 씨의 형과 같은 방을 쓰며 지냈지만, 그분은 자기네 집안에서 학비며 생활비를 가져왔지만, 우리 아버님께서는 요즘 말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를 하셨단다. 해방이 되면서, 없는 집안의 사내아이가 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이등병으로 군에 들어가거나, 순경으로 경찰에 들어가는 것이었다는데, 우리 두 숙부님께서 그 길을 걸으셨다. 경찰에 들어가신, 숙부님은 제주도 4.3 사건 때도 투입되셨었고, 나중에는 서울에서 경찰 서장까지 지내셨다. 이등병으로 군에 들어가신 숙부님은 625 때 파편에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하셨지만, 끝에는 육군 소장까지 되시며, 육군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셨다.
할머님이 돌아가시니, 후암동 일대가 마비될 정도로 조문객들이 밀려들었고, 조의금 또한 아주 많이 들어왔다. 아버님 형제들은 그 조의금을, 어려운 환경에서도 키워주신, 할머님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만들어 동네 학생들에게 골고루 지금까지도 주어 오고 있다. 이에 동네 사람들이 고마워서 이번에는 할머님의 공덕비를 세워주니, 한국에 부부 공덕비가 나란히 있는 마을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다.
집안의 이런 가풍에서 우리 선조들이 가훈이라고 특별히 내세운 것은 없었지만, 그에 버금갈만한, 단어를 찾는다면...? 하면서 선정한 가훈의 단어가 하나는 '성실'이다. 그런데, 이것만 내세운다면, 사랑 없이 너무 각박하고, 자칫 이기적으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서 여기에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인애'라는 단어로 덧붙여보았다.
'성실과 인애'를 적어 넣자면, 작은 한지에 공간도 고려해서, '성실 + 인애'가 좋을 것 같았다. '+'는 보는 사람에 따라 And나 Plus로 볼 수도 있겠고, 또 혹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보는 이에게 맡길 요량으로 주문을 했는데, 김 화백은 다짜고짜. 가운데에 아주 큰 십자가를 먼저 그려 놓고는 그 십자가 아래에 '성실' '인애'를 써 주었다. 아무쪼록 발굴된, 이 가훈이 우리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그 뜻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