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합격하게 한 자기소개서들
Market-ing. 경영학에서는 시장(수요)을 관리하는 분야라 칭한다. 혹자는 소비자로 하여금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게 만드는 일이라 정의한다.
나는 이런 정의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고 느껴
시장을 계속해서 사로잡는 일로 생각하며
직무 텐션(?)을 끌어올리곤 한다.
마케팅에 관한 글을 연재하자고 결심했을 때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소재가 자기소개서 이야기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빡센 마케팅 중 하나가 자기소개서였기 때문이다.
나는 약 2년이라는 오랜 취준 기간을 거쳐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인 마케팅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이 많은 편)
돈을 내고 자소서를 대필하는 친구도 있었고, 합격 자소서를 본인 입맛에 맞추어 바꾸는 편도 있었는데 옆에서 봤을 때 타율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도 왕왕 선배들로부터 합격 자소서를 공유받았지만 모범 사례는 말 그대로 모범사례일 뿐 '나'라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스로 채용시장의 남다른 상품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면서 자기소개서를 달리 쓰기 시작했다.
70개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내가 체득한 방법을 (작성했던 자소서 개수에 비해 합격률이 높은 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자기 브랜딩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겪게 되는 가장 큰 시련은
'내가 별로 한 게 없다는 것'이다. 학교 취업 센터를 방문하면 프로젝트나 행동의 결과를 꼭 써줘야 한다고 하는데 (이 지표를 숫자로 쓰면 좋다는 게 정석) 엄청나게 뛰어난 상을 탔거나 좋은 결과를 낸 게 아닌 이상 자꾸만 부풀리고 싶어 진다. 이럴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했다.
ex.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거나 창의적인 결과물을 냈던 경험에 대해 서술하세요.
XXX 대학생 마케터로 활동하며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XXX 부스를 홍보할 때입니다. 부스는 인적이 드문 공연장 제일 안쪽에 있었습니다. 목청 놓아 호객할 수도 있었지만, 음악축제의 불청객이 될 순 없었습니다. 마냥 XXX의 굿즈를 뿌리는 것도 장기적으로 기업 이미지를 악화시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브랜드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보호하면서도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방안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다른 부스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화장품, 맥주, 향수 기업 등 다양한 브랜드의 부스와 그 안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직원들을 보았습니다.
'TV PPL처럼 다른 부스에 XXX를 놓는 건 어때? 직원들께 드리자' 간접적인 노출로 홍보하는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이후 유동인구가 많은 부스 구획을 조사하여, 해당 부스의 직원들에게 XXX 부채와 음료를 제공했습니다. <중략> 13명으로도 일손이 모자랄 만큼 부스 방문객이 많아졌고, 성황리에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저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은, 공간성에 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아이디어가 실제 매출 효과로 이어진 데에는, 소비자의 주의를 환기하면서도 축제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XXX라는 브랜드가 전달하고자 하는 '트렌디함, 우아함, 고급스러움'이라는 가치에도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획에는 그것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그 기획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가치가 존재합니다.) 관심을 받는 데 급급해하는 것이 아닌, '여유롭게 즐기는 음악 축제'에 맞는 콘텐츠를 구상하여 브랜드 가치를 지키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창의적이고 좋은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자소서 글자 수 제한에 따라 넣고 빼고 한 내용들
내가 제안한 방법이 어마 무지한 성과를 가져왔다고 보긴 어렵다. 겨우 부스에 사람이 붐볐을 뿐이니깐 말이다. 결과가 자신 없었으니 나는 사고의 과정을 강조하기로 택했다.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그 일화를 겪으며 내가 배운 점을 솔직하게 쓰려고 했다. 이를 통해 프로젝트의 결과가 나의 유용함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사고의 과정이 나를 증명하게 만들었다.
채용시장에서 '나'라는 사람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차별화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흔해 빠진 소재를 탈피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2번 합격했던 SK의 자소서 (2018년 상하반기) 중 한 문항은 다음과 같았다.
ex. 혼자 하기 어려운 일에서 다양한 자원 활용, 타인의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며, Teamwork를 발휘하여 공동의 목표 달성에 기여한 경험에 대해 서술해 주십시오. 관련된 사람들의 관계(예. 친구, 직장 동료) 및 역할/ 혼자 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유/ 목표 설정 과정/ 자원(예. 사람, 자료 등) 활용 계획 및 행동/ 구성원들의 참여도 및 의견 차이/ 그에 대한 대응 및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한 구체적 행동/ 목표 달성 정도 및 본인의 기여도/ 경험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잘 드러나도록 기술 (1,000자 10 단락 이내) (2000 자 10 단락 이내)
지금 봐도 문제 참.. 어렵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팀플을 하며 겪었던 일 (문서 작업 배분하기)에 대해 작성했고 나는 타인의 협력을 정말 최대한으로 이끌어낼 만큼 문서 작업은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벌어졌던 해프닝들을 떠올려보았다. 문제에 몰입해 정말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했던 순간들에 대해 떠올리면 도움이 된다.
내가 선택한 소재는
교환학생 종강파티에서 일어난 오바이트 썰이다.
아일랜드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작별 파티를 하기 위해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옆에 있는 한 친구가 속이 안 좋다고 얘기했습니다. 괜찮아질 거라고 등을 쓸어내리는 그때, 친구가 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핸드백의 내용물을 다 빼고, 임시방편으로 친구의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문제는 버스에 남아있는 토를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버스가 계속 운행된다면 처리해야 하는 범위가 커질 것이었습니다. 또한, 급정거하는 상황에서 토를 치우다 다칠 수 있겠다 판단했습니다. 안전하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먼저 버스 기사님께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버스를 세웠습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2층 승객들에게 버스가 멈춘 상황을 설명하고, 근처 가게에서 휴지를 사 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후, 승객들에게 진심 어린 마음으로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다행히 굳어있던 표정도 한결 풀어졌고, 함께 치워주시는 분도 생겨났습니다 <중략>몇몇 친구들은 친구를 보살피려는 저의 진심이 닿은 것이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도움을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인종, 나이의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도움을 주셨던 모습은 아직도 뚜렷한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문제가 요구한 모든 사항(구성원의 의견 차이 등)을 만족시키진 않았지만 남다른 소재 (친구 오바이트)와 자원 활용 계획 및 행동의 차별화로..
내가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사람인 지 잘 설명할 수 있던 것 같다.
장단점을 어필할 때 자주 하게 되는 실수 중 하나는 좋은 단어를 마구 갖다 붙인다는 것이다. 여러 신문사 및 방송사에 단골로 썼던 나의 장점은 섬세한 관찰력과 소통인데 나는 두 단어를 곧잘 연결시켜 '대화 맛집'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강조하고 싶은 건 신조어가 아닌 두 특성을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ex. 본인의 장점 또는 기자/PD에게 필요한 역량
마음에 드는 맛집이 생기면 반드시 주변인을 매혹하고 마는 ‘영업왕’, 그런 나조차 익명의 독자와 마주하는 것은 도전이었다. 블로그는 3년의 세월을 거쳐 하루 평균 10명에서 300명, 최고 1,200명이 방문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남들과는 다른 글을 쓰겠다는 일념 하에 가게의 구석구석을 살핀 덕분이다. 사려 깊은 시선으로 가게를 관찰했고 애정 어린 대화에 기계적으로 음식을 갖다 주시던 사장님의 눈에 총기가 어렸다. 음식 평가를 넘어 가게의 '서사'를 말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오사카에서 방문한 초밥집의 명동점 개업에 초대받을 만큼 낯선 이들과 나를 가까워지게 했다. <중략>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는 나의 고집스러운 시선은 그동안 나 자신을 참으로 고달프게 했다. 그러나 섬세한 관찰과 끈기 있는 소통으로 마침내 완성되는 '대화 맛집'은, 어쩌면, 사소한 현상에서 거대한 사회적 징후를 포착하고, 집요하게 화두를 던지는 기자의 역량과 결을 같이하는 것은 아닐까.
섬세한 관찰 덕분에 얻게 된 나의 강점은 '대화를 잘 이끌어가는 능력'이고 PD와 기자에게 중요한 역량이기도 한 '낯선 이의 경계심을 푸는 능력'이다.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자 할 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반드시 직무와의 연결성을 생각하며 장단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방법론에 대해서는 같은 소재 돌려쓰기 등 유용한 팁(?)이 남아있으나 그렇게 잘난척할만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업으로 삼는 마케팅에 대한 진득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만 마치고자 한다.
오랜 기간 취업을 준비하며 힘들고 고달팠지만
내가 누군지에 대한 윤곽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
나에게 분명히 필요한 시간으로 체화됐다는 뜻이다.
취준을 통해 나는 엄청난 성과에 욕심내기보다는
떳떳하고 싶은 사람이었고, 늘 뭔가를 사부작 거리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열정가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분석한 자신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떳떳한 사람으로서, 열정가로 살아가며 내가 뽑아낸 나의 브랜드 속성들을 잘 성장시키고 지켜나가고 싶다.
나를 포함한 브랜딩 제너레이션,
모두 파이팅이다.
(이 글을 보게 되는 취준생 여러분이 계시다면
늘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