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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은 May 27. 2020

28살이 뭐 그리 어렵다고

새벽에 혼자 축하한 생일

 05월 27일 00시 00분 01초.


생일이 시작되는 순간에 발맞춰 누가 먼저 축하하나를 경쟁하던 날들. 스스로도 그런 배지를 달기 위해 친구들의 생일을 기록하고 외우던 시절이 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친구들과 함께 생일을 맞는 일이 잦았다. 전날 저녁 6시부터 모여서는 한 시간 남았다 10분 남았다를 합창하며 정성스레 나의 생일이 오는 길을 반겼다.


28살의 생일은 다르다. 생일 주 앞뒤로 2주 동안 목금토일을 꽉꽉 채울 만큼 약속을 잡아놨는데 정작 당일엔 의식처럼 해오던 일을 모두 제치기로 했다. 그냥 회사를 갔다가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마치면 내 생일은 끝나게 된다.


생일 하루 전날엔 내가 고대하던 28살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너무 피곤해져 버려서 그만 10시에 잠들고 말았다.


28살의 나는 단정한 모습을 하고 착실하게 저축한(?) 사람이길 바랐던 거 같다. 그런데 옷장은 어딘지 튀는 구석이 있는 옷들이 더 많았고 단정한 머리에 질려버린 나는 그동안 다니던 청담의 미용실 대신 홍대입구로 찾아가 머리를 잘랐다. 저축과 투자에 관한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지만 이론만큼 실행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생일이 된 01초의 순간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05월 27일 03시 10분 ~ 06시 30분


일찍 잠든 탓인지 갈무리되지 않은 생각 때문인지 새벽에 눈이 떠졌다. 2시간 동안 뒤척이길 반복하다가 잠들지 못할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세상에 나를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기념일.

나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아침 밥상을 차렸다.

기념사진은 흑백으로

기껏해야 냉장고에 남아있는 음식을 탈탈 털어서 만든 생일상이었지만 스스로를 대접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꽤 기특하게 생각했다.


커튼 사이로 어스름한 새벽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바짝 붙어있는 건너편 오피스텔의 창문에 불이 꺼져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식사를 즐겼다. 고요와 낭만이 넘쳤다. 새벽에 깨는 일이 늘 하루를 망치는 건 아니구나 깨닫는다.


뒤이어 축하해줘서 고맙다 말을 전하는 데 정신이 팔리는 대신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내가 태어나다니! 무려 28년이나 살고 있다니.

갑자기 생각해보니 너무 신기한 거 아닌가.

내 앞에 주어진 생의 의미에 집중해본다.

그냥 잘 살면 되겠구나 싶다.


05월 27일 06시 45분


후다닥 노트북으로 오늘 아침을 기록하는데

하나 둘 생일 축하 메시지가 온다.


애매한 시간에 깨어버린 나의 생일.

최소 커피 3잔을 들이켜야 할 게 눈에 선하지만,

오늘을 누구보다 길게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아주 잘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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