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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Jun 15. 2020

사망보험금 수익자를 지정하려고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을 위한 소소한 준비


얼마 전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려다가 끝내 접수조차 하지 못한 퀴어 부부의 기사를 읽었다.

평소에도 마음으로 응원하던 중이었으나 그 기사를 보고 결국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건 혼인신고를 시도조차 못한 채 결혼식을 올린 지 천일이 다 되어가는 우리 상황이 생각나서인지도 몰랐다.


나는 스스로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것에 익숙지 못하여 조금 낯 뜨겁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가끔 푸념하고 싶어 친구에게 이 말 저 말 털어놓다가도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모르겠네, 미안해. 우중충하지."하고 너스레를 떨고야 마는 성향인 것이다.

그렇기에 매주 한편씩 쓰는 이 글에도 보통은 우리의 처지나 처우 같은 것을 강하게 묘사하며 쓰는 것이 혹시나 자기 연민처럼 비치지는 않을까 무척 고심하며 쓰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나의 선택이고, 나는 그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아이를 못 키우면 뭐 어때. 사랑스러운 고양이들과 사는 삶으로 충분해. 노후자금도 금방 확보할 수 있을걸.

양가 부모가 모르는 것이 뭐 어때서. 고부갈등 같은 건 아예 없는 삶이잖아.


나는 여우가 포도를 보며 신포도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듯 늘 그렇게 나의 삶을 만족 속에 욱여넣기 위한 무수한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내가 사랑스럽고, 고양이들이 사랑스럽고, 직장은 안정적이며 이사를 갈 때마다 집 크기도 충실하게 넓혀가고 있었으니까.

팩트만 놓고 보자면 굳이 가지 못할 길을 보며 입맛을 다실 필요까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종종 힘이 빠지는 순간들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내가 여성이고 아내가 있고, 우리가 혼인신고 접수조차 불가능한 동성 부부라는 이유로 평범하고 안정적인 이 삶이 가끔 흔들거리는 다리 위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은 사회에서 부정당하고 배제당한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눈 앞에 들이밀어질 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빚 독촉을 받듯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정상적으로 살면 되잖아, 남들 다 하듯이.


아마 엄마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과연 남들 다 하는 그런 결혼생활이란 그렇게 다 똑같은 모양의 삶일까. 그저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형식을 따르고 있을 뿐 그 안의 삶은 모두 모양이 제각각이지 않은가. 큰 틀만 같을 뿐 그 위에 올리는 토핑이나 데코레이션은 모두 다른 쿠키 같은 것이 아닌가.



최근 엄마가 나와 아내가 사는 집에서 며칠간을 묵겠노라고 통보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으니 나와 아내는 여전히 내 엄마에게 친구사이일 테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막무가내처럼 느껴져서 나는 친구에게도 불편한 일이니 이번 달에 꼭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고 동생을 통해 엄마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동생을 통해 전달한 것도 최근 엄마가 내가 아닌 남동생 하고만 전화 통화를 하려고 들기에 그랬다.)


그 결과 엄마에게서 터져 나온 말들을 동생에게 전해 듣고 나는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내가 왜 내 딸 집에 가는데 그 친구를 배려해 줘야 돼? 그 친구랑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뭔데? 내가 지금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한두 개인 줄 알아? 결혼도 안 하고, 애도 낳을 생각 없이 친구랑 그 나이 먹도록 살고 있는 게 지금 정상인 거야?"

대충 이런 말이었다. 나에게 칼날처럼 푹 박혀 한동안 빠지지 않을 말들을 외쳤을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말을 면전에 들었다고 한들 뭐 하나 속 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할 나를 떠올리며 참담하고 비참했다.


그 친구랑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뭔데.

아아, 나도 보통의 부부처럼 그런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왜 같이 살아야만 하는지 이 사회가 나서서 당위성을 설명해준다면 좋겠다. 엄마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라면 그게 맞다고 말한다고 한들 우리가 부모에게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까. 결국은 혈연을 끊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 서로를 등지고 걸어야만 나의 가족과 나의 평화가 지켜질 수 있는 걸까.


결국 '결혼도 안 하고, 애도 낳을 생각 없이' 이 나이 먹도록 '미혼'인 딸은 아무리 행복하게 제 삶을 잘 꾸려가고 있어도 내 엄마에겐 끝없이 부끄러운 자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요 며칠 나의 머리를 무척 아프게 만들었다. 도무지 풀어지지 않은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뒤엉켜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엄마를 위해서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그럴 순 없다고 내 마음속에서 결론이 지어진 지 오래된 문제였다. 가뜩이나 타인과 한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내가 굳이 엄마를 위해 내키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 같은걸 해가며 한 공간 안에서 부대끼며 살다가 결국 우울함 속에 빠져가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 그때부턴 그 결혼은 다 무쓸모한 일이 된다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낭비 같은 건 하기 싫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삶인데.


그래서 사망보험금이 나오는 보험을 추가로 들었다. 수익자도 곧 변경하여 아내로 지정할 것이다.

결론이 좀 생뚱맞게 느껴질 수 있는데 내겐 이게 맞는 방향으로 흐른 결론이다.


굳이 맥락에 맞게 문장으로 표현하다면 '내가 해결하지 못할 외부요인에 대한 과도한 신경을 좀 접어두고, 내 가족을 지킬 방안부터 차근차근 고민하자.'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사회든 엄마든 내 삶에 손가락질하거나 험한 소리는 할 수 있어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늘 느끼지만 삶을 살 때 느낄 환희나 고통, 죽어가는 순간 느낄 회한까지도 모두 내 것이고 내 몫이다. 그러니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을 나의 삶을 사는 한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네,그런 말을 하고 싶으셨군요, 그래요, 고마워요, 하고 넘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내가 사망한 이후에 아내가 내 아내로서 슬픔만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누가 뭐래도 아내는 나의 반려자로 최선을 다해 가족의 삶을 함께 꾸려온 만큼 우리가 만들어온 것들을 내 부모나 또 다른 알지도 못하는 먼 혈연에게 빼앗기고 절망에 빠지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다.


길바닥에서 내가 갑자기 사고로 죽더라도 내 아내가 정당한 몫을 받고 슬픔만 책임지면 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디서도 그런 보장을 약속받지 못하는 우리는 그냥 보험수익자 지정 정도로 약간의 안심과 위안을 얻는 수밖에 없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준비해 가며 사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있을까.

삶이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내게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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