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생에는 용기있는 해녀가 될고야....
진지하게 해녀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격무에 시달리던 이십대 끝자락 1박2일 일정도 마다하지 않고 한 계절에도 몇번씩 찾아갔던 제주도. 제주 바다가 내 남은 생의 일터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빛깔을 바꾸며 쉴새없이 숨쉬는 바다, 새까만 현무암에 사계절 내내 초록초록한 풀들이 자라나는 포근한 제주 바다에 상사병이 단단히 걸렸다. 제주에 있다 서울에 올라갈때면 마음이 침울해지고, 서울가는 비행기에서 제주에 올 일정을 잡은 후에야 마음이 괜찮아졌다.
그 무렵, 억새가 멋진 가을날을 골라 나홀로 스쿠터 일주를 떠났다. 하늘 바다 바람의 삼박자가 더할나위 없이 완벽했던 그때 제주 해안 곳곳을 탐색하던 중 서쪽 바다에서 발견한 해녀학교에서 운명을 느꼈다. 물도 좋아하고 수영도 좋아하고 성게 멍게 해삼도 없어서 못먹는 내가 너무나 잘할 수 있는 일이 확실했기에 다음학기 등록 일정을 확인하고 제주로 이주하겠다는 큰 결심을 했다. 마침 당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스텝을 구하고 있어 모든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을 만나 면접도 보고 해녀학교 등록 서류도 미리 확인한 뒤 부푼 가슴을 안고 제주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 섬에 다시 올 때는 이민가방을 들고 올거란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스쿠터 일주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 태풍이 노선을 틀어 제주지역을 관통한다는 예보가 있었다. 공항 근처에서 빌려온 스쿠터는 공항근처까지 가져다 놔야 했기에 서둘러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최단 경로로 공항에 가기위해서 거쳐야 하는 왕복 8차선 도로에 진입하자 눈앞에 있는 모든 지형지물들이 처음 보는 형태로 흔들리는 광경을 마주했다. 똑바로 고정되어있는 줄 알았던 도로 표지판들은 일제히 앞뒤로 춤을 췄고, 헬맷에는 모래 보다 조약돌 크기에 가까운 돌들이 날아와 부딪히기 시작했다. 나를 추월해가는 차들도 흔들흔들 차선을 지키기 어려운 와중에 스쿠터로는 속도를 맞출 수 없어 그나마 운전에 자신있는 해안도로로 경로를 틀었다. 제주를 올때마다 너댓번은 달렸던 세상 낭만적인 도로가 생전 처음 와보는 지옥문으로 변했다. 바다와 하늘은 현무암처럼 까맸고, 보이지 않은 채 들리기만 하는 엄청난 파도소리가 공포감을 조성했다. 해안가라 바람의 속도도 더욱 거세져 이러다 스쿠터를 타고 물질을 할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제주 바다가 처음으로 무서웠다. 해녀는 다음생에 하는 것으로, 그날 태풍에 해녀의 꿈마저 날려버렸다.
가끔 찬란한 바다를 마주하거나 좋아하는 해산물이 눈앞에 놓이면, 해녀를 꿈꿨던 그 마음이 스물스물 살아난다. 그냥 바다가 좋아서, 제주가 좋아서 그 곁에서 먹고, 자고, 살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는데 빛나는 바다 이면에 어둠을 관통한 뒤 그 마음마저 작아진 것을 보니 바다를 동경하는 내 마음이 지나치게 가벼웠던 건 아닌가 싶다.
태풍속에서 스쿠터를 끌고 제주를 횡단했던 그날의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바다의 어둠보다 현재의 빛이었을지 모른다. 태풍 뒤 맑은 날들이 주는 기쁨처럼 지질하게만 느껴졌던 그 날들에도 작지만 소소한 기쁨들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해준 태풍에게 감사를 전한다.
살려줘서 고마와
다음생에는 꼭 용기있는 해녀가 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