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차 감정노동자의 감정찾기
아스킁킁사주세요
2005년 무더운 여름 ‘슈퍼을’들이 모여 밥벌이를 하는 대행사의 인턴으로 첫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회사 근처 김치찜 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점심을 한후 마음의 소리를 내뱉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날 이후 선배들사이에서 내 별명은 킁킁이가 되었다.
인턴으로 회사에 출근은 했지만 실질적 신분은 대학생에 가까웠던 시기.
회사용어 보다 스물셋 대학생 말의지분이 더 높았던 그때, 선배들이 좋아라해 주었던 나의 말들은 모두 철딱서니 없는 여대생 마음 속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창의력이 고갈된 대행사에서 이따금씩 쓸모를 발휘했고, 인턴에서 신입사원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정많은 인턴사원의 거름망 없는 언행들이 귀여울 수 있는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빨리 커서 제몫을 하길바라는 선배들의 혹독한 지도편달과 훈계, 특히 야근에 대한 구체적인 압박은 발랄한 대학생을 생기없는 신입사원으로 바꿔놓았다. 자정이 다된 시간까지 작성해 놓은자료를 선배에게 컨펌 받지못해 울음을 터뜨린 날이었다.
“여기가동아리야? 회사서감정내비치지마. 이렇게야근할때마다울고불고할거야?”
삐죽빼쭉 모양은 맞지 않아도 시원시원하게 내뱉을수 있었던 가슴 속 말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회사에서 보고 배운 머릿속 말들로 채워나갔다. 그 시기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두꺼운 보고서 인쇄물을 펀칭으로 눌러 스프링을 끼운 제본 파일을 만드는 일이었다. 마음 쓰이는 일은 최대한 영혼없이 처리하고 단순 반복적인 일을 할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회사 생활의 본질을 다 깨달았다 생각했다.
비로소 출근하는 기계가 된 것이다.
직장생활 10년차를 넘길 무렵 ‘슈퍼갑’들이 모여 밥벌이를 하는 금융사로 이직을 했다. 안정지향을 최우선 가치로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일을 익혀나가며 새로운 회사에 적응 했다. 속해 있던 팀이 IT 부서로 재편되면서 고객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APP을 개선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어플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업무 처리하는 화면의 개선점을 찾고 고쳐 나가는 작업은 예상한 것보다 고됐다.
돈을 맡긴 고객의 입장에서 내계약을 확인하고 돈을 신청하는 화면들을 들여다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업무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것은 쥬니어때 졸업했다 여겼는데 불편함을 초월해 화를 부르는 화면들을 보고서도 자신의 업무편의나 현상유지만 토로하는 담당자들과 대화를 할때면 잊고 있던 분노의 감정이 끓어올랐다. 분노는 잠시, 고객화면을 개선하려면 반대하는 많은 담당 부서들을 설득해야 했다.
내 감정은 최대한 누르고 상대방이 최대한 협조할 있도록 어르고 달래는 슈퍼 갑 속의 보이지 않는 슈퍼을이 되었다. 아니 을도 못된다. 업무를 담당하는 현업, 개발을 담당하는 IT, 심의나 법률이슈를 담당하는 부서들까지 생각을 바꾸게 만들어 이고 지고 가야하는 갑을병정에 정 정도 될까말까한 감정노동자로 밥벌이를 이어가고 있다.
출근하는 기계로 시작한 사회생활, 아이러니하게도 맡는 업무가 고도화 될수록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아웃풋을 만들어야 할때가 많다. 스마트폰나 PC같은 기계 화면에 사용자의 마음에 맞는 적당한 온도의 메시지와 기능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다보면, 내마음속에 기절해있던 다정한 감정들도 하나둘씩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더우니 아스킁킁을 먹고 들어가자던 철부지 인턴사원의 말들을 구엽게 아껴주었던 선배들을 떠올리며, 기계가 가지지 못한 마음을 보여주는 나의 일에 좀더 정성을 쏟아야지 새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