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불구하고 여름마다 잘 먹겠습니다아!
싱싱한 오이를 깨끗이 씻어 통째로 굵은 소금에 절이고 짱돌로 꾸욱 눌러 보관시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생생한 녹색이 노르스름하고 희뿌옇게 되도록 익으면 거친 오이의 질감도 한풀 꺾여 부드럽게 오독오독 씹기좋은 식감이 된다. 잘 익은 오이지 하나를 칼로 크게 삼등분을 하고 자른 부분에 십자가로 칼집을 내어 손으로 죽죽 찢어낸다. 찬물에 살짝 담궈 씻어내고 접시에 담으면 흰밥부터 파스타, 라면, 치킨, 회, 탕수육까지 대부분의 음식의 맛에 생동감을 업시켜주는 감초같은 파트너가 된다. 적당히 시고 적당히 짭쪼름해 여름 내 아껴먹는 집반찬, 울엄마표 오이지다.
어릴때를 생각해보면 엄마의 오이지가 항상 지금의 맛 같지는 않았다. 어떤 오이지는 물에 오래 담궈놓아도 입에 짰고, 아주 가끔은 떫을때도 있었지만 내 여름엔 항상 오이지가 있었다. 언젠가 내 스스로 오이를 많이 사게되는 날이 온다면 엄마에게 오이지 레서피를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이지는 항상 엄마가 만든 오이지만 먹고싶다. 30년을 담궈 경지에 오른 엄마표 오이지는 따라해볼 엄두가 안나는 마스터피스 그대로이며, 나에게 오이지는 곧 엄마이기 때문이다.
유독 덥게 기억되는 초딩시절 여름방학, 엄마는 일이주에 한번 꼴로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다듬었다.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고구마순 보라색 줄기의 억센 다발을 한올한올 껍질 벗겨 연한 초록색 줄기로 만들어 빈바구니에 담던 모습. 어린시절 엄마를 도와 고구마순 지옥을 한번 경험해본 후로, 그 반찬을 먹을때마다 쪼그려 앉아 그 많은 줄기를 손끝으로 다듬어내던 여름날 엄마가 생각나 마음이 뜨거워진다. 고구마순 김치는 한아름을 다 다듬어도 양념장을 묻혀 김치로 만들면 숨이 죽어 김치통 하나를 꽉 채우지 못 할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철딱서니 없는 딸래미는 고구마순 김치 뒤에 숨은 많은 노고를 알고 난 후 되려 고구마순 김치 성애자가 되었다. 여름철 싱싱한 제철 채소를 그때그때 김치로 신선하게 만들어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 어느날 식구 모두가 그 반찬이 지겨워서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해도 엄마의 여름날 고구마순 다듬기는 계속될것이다. 늘 혼자먹는 밥상이지만 고구마순이 냉장고에 있는 날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것 같은 든든한 느낌이 든다. 나에게 고구마순 김치는 곧 엄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평양냉면, 콩국수, 모밀국수, 삼계탕, 민어 등 여름이면 수 많은 제철음식들을 찾아 나서는 식도락이 되었지만, 나의 모든 여름날에 공기같이 존재했던 엄마의 여름반찬. 여름에 태어난 내가 건강하게 맛을 즐기는 어른으로 자라나는데 부족함 없는 땅이자 물이자 햇빛이 되어주었던 엄마의 여름음식. 엄마가 더 오랫동안 그 음식들을 즐겁고 기꺼이 만들 수 있기를, 더 늦기 전에 엄마의 고생과 정성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겠다.
엄마 오래오래 잘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