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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샘 Jan 17. 2020

포도가 재배된다

자갈밭에서도 자라는 포도

#1. 농부에게 농사하기 좋은 땅의 조건을 물으면, 대개 ‘토양층이 두껍고 배수가 잘되는 땅’이라고 답한다. ‘양토’라고 부르는 이 땅은 모래, 실트, 점토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이루어진 땅이다. 포도밭으로 가장 좋은 땅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래, 실트, 점토가 적절하게 혼합된 토양이 최고다. 그 이유는 땅이 수분을 함유하고 수분의 흐름을 지연하기 위해서는, 특히 여름철 건조 기후에서는 충분한 양의 점토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수분이 모세관 수로 유지되되, 땅이 수분에 너무 흠뻑 젖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실트와 모래도 충분히 포함되어 있어야 좋은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양의 구성 물질 중 모래보다 실트, 실트보다 점토가 땅에서 수분을 함유하는 능력이 크다. 따라서 토양의 특성은 땅속에 있는 수분에 접근하기 위한 식물의 능력, 더 나아가 수분 속에 있는 영양소에 접근하기 위한 식물의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토양에서 식물이 흡수하는 상당한 양의 영양소는 수분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토양은 포도나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포도주 맛은 토양이 좌우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주들은 포도 재배에 알맞은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 그러나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포도나무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히 비옥한 땅이기보다는 토양과 기후와의 조화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분을 잘 흡수하고 유지하는 점토는 습하고 차가워서 건조한 기후에서는 포도 재배에 적합하다. 반면에 수분을 잘 통과시키고 점토를 적게 포함한 자갈 토양은 온화한 기후에서 기온을 높여 주는 효과가 있어 포도나무에 좋다.


생명력이 강한 포도나무는 건조한 땅에서도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어 필요한 수분을 빨아올릴 수 있어, 사실 포도나무에 가장 적합한 토양은 건조 기후 지역의 토양이라고 한다. 또 자갈, 모래, 석회석, 진흙 등이 뒤섞인 척박한 땅에서 더 잘 자란다. 이 때문에 다른 형태의 농업으로서는 불가능한 토양 환경에서도 포도 재배는 가능하다. 


#3. 포도 재배에 요구되는 토양 특성 중 배수 조건이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한다. 수분이 많은 땅은 차가워서 포도 숙성을 방해하지만, 배수가 잘되는 땅은 포도 숙성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산지 또는 구릉의 경사지는 배수가 잘되지만, 계곡 바닥은 배수가 잘되지 않아 갑자기 서리를 맞는 일이 잦다. 이런 배수 조건은 같은 지역이라도 포도밭마다 달라 서로 전혀 다른 포도주를 생산하는 배경이 된다.


#4. 포도 재배의 토양 조건에서 또 고려할 사항은 암석의 특성이다. 암석이 침식을 통해 풍화되면서 토양의 특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독일 모젤 지방에는 암석의 특성을 활용한 포도밭이 유지되고 있다. 이곳의 토양 성분은 주로 점판암이다. 이곳의 점판암에 의한 토양은 낮에 햇볕을 흡수해서 저녁에 온기를 내보내 줌으로써 포도 재배에 불리한 독일의 쌀쌀한 기후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바로 이러한 토양 특성이 모젤 지방에서 리슬링 포도가 잘 익을 수 있는 포도밭이 생겨나게 했다. 또 점판암의 광물질은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진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경사가 급한 포도밭에 눈이나 비가 오면 점판암이 아래로 잘 미끄러져 내려가는 문제가 발생해, 그때마다 농부들은 미끄러져 내려간 점판암을 다시 끄집어 올려야 하는 수고가 뒤따랐다. 또 토양 침식을 예방하려고 등고선 방향(경사를 횡단하는 방향)으로 농작물을 심는다. 

모젤의 포도밭과 점판암에 의한 토양(황만수, 2011)

독일 모젤 지방의 포도밭 입지를 정리하자면, 첫째 일조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배수가 양호한 산지의 남사면에, 둘째 포도밭 앞 강에서 반사되는 햇빛을 얻을 수 있는 강변에, 셋째 열기를 저장하고 광물질을 제공하는 점판암에 의한 토양이 분포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한마디로 이곳의 포도밭은 기후, 지형, 토양의 특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상적인 포도밭이다.


#5. 프랑스 아비뇽 지방에는 굵은 자갈로 된 포도밭이 있다. 아비뇽 교황청 시절, 프랑스 교황은 아비뇽 북부 지방에서 굵은 자갈이 뒤덮고 있는 땅에 포도나무를 심고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의 ‘샤토 네프 뒤 파프’라는 포도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자갈은 지중해로 흐르는 론강에 의해 퇴적된 둥근 자갈로 포도밭 유지에 요긴하게 쓰였다. 프랑스 남부의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포도밭을 보호하고, 열을 저장한 후 서늘한 밤에 포도밭에 열을 다시 내뿜음으로써 포도의 숙성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둥근 자갈밭은 프랑스 중앙고원에서 론강 계곡으로 부는 미스트랄이라는 한랭 건조한 북서풍으로부터 포도나무를 보호해 주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다.

샤토 네프 뒤 파프 포도밭 (좌: http://m.blog.daum.net/winelady, 우: 그랑 라루스 와인 백과)

#6. 앞에서 말했듯이 토양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같은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는 포도밭일지라도 포도주 맛이 상당히 달라진다. 독일의 경우, 모래가 많이 섞인 적색 점토에서는 포도즙의 농도가 높고 산(酸)이 많은 포도주가 생산되고, 석회질을 함유한 황토에서는 포도주가 연하다. 석회질이 많은 이토(泥土)에서는 알코올 함량이 비교적 적으나 향이 좋고 포도주가 부드러운 반면, 철분이 함유된 이토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알코올 함량이 높고 색깔이 매우 진하다. 사석(沙石)과 각력암(角礫岩)이 풍화되어 형성된 기공이 많은 모래땅에서는 포도주 색깔이 밝고 향기가 향긋하며, 또 가볍고 연한 포도주가 생산된다.     


스페인 리오하 마르케스 데 카세레스 포도밭: 앞의 아비뇽 포도밭보다 더 굵은 돌로 뒤덮여 있다.

#7. 프랑스 보르도에서 포도밭은 마지막 빙하기에 형성된 잘게 쪼개진 암석과 혼합된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빙하 퇴적물이 있는 곳에 조성되어 있다. 보르도 포도밭 조성에는 이곳의 기후인 서안해양성 기후도 한몫을 했다. 서안은 내륙보다 연교차가 상대적으로 작아 여름 기온이 낮고, 늦은 봄과 이른 가을의 서리 발생 빈도를 낮추어 준다. 이와 같은 해안 근처의 기후 조건은 빙하토(氷河土)를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의 포도 생산에 이상적인 토양으로 만들었다.

 

참고자료     

김상빈(역), 와인의 지리학, 푸른길, 2018

정수경(역), 오즈 클라크의 포도주 이야기-현대적인 감각의 포도주 가이드, 푸른길, 2001

창해 편집부, ABC북 맛보기 사전 - 와인, 창해, 2012

최영수·김복래·김정하·김형인·조관연, 와인에 담긴 역사와 문화, 북코리아, 2005

황만수, 포도밭의 일 년, <베를린 리포트>(독일 동포 미디어), 2011 

그랑 라루스 와인 백과

http://m.blog.daum.net/winelady/12288464?tp_nil_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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