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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나물 Nov 16. 2021

인생은 템빨-스쿠버 장비에 대하여

초보 스쿠버다이버의 일기 09

SNS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인생은 템빨'이라는 말이 있다. 탁월한 아이템을 잘 사용하는 것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나의 인생템은 바람이 센 헤어 드라이기, 로봇 청소기, 자동접이 우산이다.


스쿠버다이빙은 장비로 시작해서 장비로 끝나는 장비 스포츠다. 장비의 기능과 질이 스포츠의 재미에도 꽤 영향을 미친다. 물론 대여장비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맞는 장비를 쓰면 더 편안하게 물속을 누빌 수 있다고 한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나는 초보니까 좀 가려도 된다.


RPG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이템의 매력을 잘 알 것이다. 처음에는 면티에 어디서 주은 칼을 차고 있다면, 서서히 옷과 신발과 무기, 체력, 스킬을 업그레이드하는 재미가 있다. 예전보다 화려한 옷을 입고 멋들어진 공격을 선보이면서 시각적, 경험적으로 스스로의 성장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쿠버 장비는 게임 아이템과 닮았다.



먼저 개성 표현을 위해 구매한다는 점이 그렇다. 스쿠버 장비도 기능, 디자인, 브랜드, 가격대에 따라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듣기로는 우리나라가 해외에 비해 브랜드나 디자인을 따지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타인의 시선을 더 신경 쓰거나 유행에 민감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한다. 남들은 쉽게 살 수 없는 브랜드를 사서 ‘하차감’을 느낀다. 승차감이 아닌, 좋은 차에서 내릴 때의 뿌듯한 마음과 비슷하다. 혹은 물속에서 나를 나타내기 위해 마스크와 오리발의 색상을 고르고, 미키마우스 귀가 달린 후드를 쓴다던가 다양한 액세서리를 달기도 한다.


개성 표현보다 아이템을 구매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능력 향상에 있다. 대여장비는 아무래도 나랑 꼭 맞지는 않는다. 나의 신체 사이즈에 더 잘 맞고, 내가 꾸준히 사용하는 장비가 있으면 실력이 늘고 물속에서 편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성비 최고 아이템은 뭐니 뭐니 해도 오리발이다. 얇은 대여 오리발로 했을 때는 잘 안되던 킥이 오리발을 사니 시원시원하게 나갔다. 크레이지아케이드에서 우주선을 탄 기분, 카트라이더에서 부스터를 쓰는 기분이었다.


스쿠버다이빙이 게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상의 아바타가 아니라 실제의 내가 직접 아이템을 장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각만 해도 매력적이지 않은가?


게임에서는 체력이 떨어지면 물약을 먹어서 회복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게 바로 공기탱크다. 기본적으로 공기탱크 안 산소와 질소 비율은 일반 공기 비율과 같게 설정된다. 그런데 다이빙을 하며 질소가 체내에 축적되면 피로감이 느껴진다. 자격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 일반 공기 통보다 산소 비율을 더 높인 공기탱크를 사용할 수 있다. 이를 나이트록스라고 한다. 보통 바다에서는 하루 2번 정도 다이빙을 하는데, 하루에 4~5 탱크씩 힘들게 하는 날이면 그 차이가 느껴진다고 한다. 질소 축적량이 줄기 때문이다. 나이가 내 부모님 뻘인 분도 나이트록스 탱크를 쓰니 확실히 일반 공기탱크를 쓸 때보다 체력이 덜 부쳤다고 하셨다. 나이트록스 탱크는 만원 정도 더 비싸다. 그분이 나에게 한 말이 너무 기억에 남는다. 스쿠버다이빙이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이유다.

돈으로 못 사는 게 젊음이랑 건강이잖아. 그런데 단 돈 만 원으로 체력을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다른 아이템들도 많다. 스쿠버 장비는 알면 알수록 정말 끝이 없다. 또 레벨업을 하게 되면 직업을 정해 전직을 하듯이, 실력이 늘고 자격이 많아질수록 더 다양한 종류를 고를 수도 있다. 현실판 RPG 게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아이템을 가지려면 '현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떤 브랜드를 사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 장비만 갖춰도 몇백만 원은 훌쩍 넘는다. 반면 내 월급은 귀여운 편이라 좀 망설여졌다. 처음 장비 가격을 알았을 때는 분수에 안 맞는 럭셔리 취미를 가진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생명과 연관된 것들이고, 시장이 크지 않아 물가 자체가 다르다. 요즘 카푸어나 하우스푸어가 많다던데, 나는 스쿠버 푸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빠져버린 세계를 돈을 이유로 포기하는 것은 너무 아쉬웠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나중으로 미루기는 싫었다. 고민 끝에 지금은 대여장비를 사용하고, 내 장비는 천천히 하나씩 장만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평생 동안 할 취미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매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소비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좋은 점이 있다. 돈을 벌 명확한 이유가 생겼다. 목표가 생기니 월급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고, 경제와 투자에 관심이 커졌으며, 돈에 대한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올해는 나에게 슈트를 선물할 생각이다. 다음 바다에서 더 레벨 업할 나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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