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한 달 살기 sustainable 02
"열심히 살았는데 잘 다녀와, 너무 좋겠다."
떠난다는 용기에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더불어 '바르셀로나는 소매치기 왕국', '애 딸린 여행객은 좀도둑 보물창고', '자동차 유리창 깨고 가져감', '10분 외출도 귀중품은 금고에' 등 주변의 멘트들이 줄줄이 더해졌다. 덕분에 잔뜩 예민해진 남편과 나. 코로나 이후 첫 출국이니 초반 일주일 간 바르셀로나 시민 모두 우리의 경계 대상이었다. 그저 옆을 스쳐 가기만 해도 온몸에 레이더가 켜졌고 조그만 소리에도 쫄보가 돼 밤잠을 설쳤다.
어린아이와 함께하는 한 달 살기는 일반 여정과 다르다. 치안 문제로 도시 한 복판에 숙소를 구해야 하니 비용이 만만찮고 느린 스텝이 요구되는 갤러리 투어는 아이의 기분에 따라 도장 깨기처럼 찍고 오는 경우도 다반사. 현지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밤문화나 '모히토'에서 '몰디브' 한 잔 하고픈 일정도 생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다면 일단 떠나보기를, 커리어를 멈추고서라도 다른 문화권으로 날아가 보기를 추천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갇혀 쳇바퀴처럼 돌아가던 환경에서 물리적으로 벗어나 높고 넓은 시야에서 더 나은 선택지를 분별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의 문제
왕복 항공권과 도착하는 날 짐 풀 호텔 한 곳이 스페인과 연결된 가느다란 선이었다. 가이드북 두 권 모두 장기 숙박은 현지에서 며칠 지내본 다음 결정하는 것이 낫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 14시간을 날아 도착한 바르셀로나는 저녁이었다. 첫 숙소는 자동화된 '체크인- 체크아웃 시스템'으로 비대면의 편리를 강조하던 쿨한 호텔이었다. 그 쿨함이 싸늘하게 바뀐 건 이틀 후 체크아웃하던 날 아침. 이른 아침 상점에 다녀오니 방문이 열리지 않는다. 번호를 누르고 또 눌러도 묵묵부답. "혹시, 누가 들어와서 가방을 터는동안 키 번호가 안 눌리게 잠가버린 것 아닐까?" 허둥지둥 예약 메일에 연락처를 뒤져보니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호텔 체인 플랫폼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방문이 잠겼는데 캘리포니아로 전화하라고?"
체크아웃 두 시간 전. 되지도 않는 회화 실력의 나는 한 손에 번역기를 들고 캘리포니아에 전화를 넣었다. "쏘리? 파든?"을 남발하며 어찌어찌 사정을 설명하니 바르셀로나 사업부에 연락을 넣겠다고 기다려보란다. 3시간처럼 느껴지던 30분 간의 초조함 덕분에 때 이른 겨터파크 개장을 맞이하고....
"시차 때문일까?" 조급한 맘으로 이번에는 인터넷을 뒤져 바르셀로나 고객 센터를 찾아 3명의 담당자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렵게 연결된 담당자, 우리가 갇힌 호텔 지점명을 묻는다. "우리는 바르셀로나에만 열개가 넘는 00호텔 체인을 운영 중이야. 지점명을 말해줘야 방 문을 열어줄 수 있어. 이를테면 00호텔 선릉역 4번 출구점' 이런 식." 체크인한 고객 정보로 지점을 확인해 줄 생각은 못하던 로봇 같은 대응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우리가 아는 건 호텔이름뿐이고 지금 호텔 안쪽에 있는데... 대체 어디에 쓰여 있을까, 스페인말로 된 걸 우리가 식별할 수 있을까'
강조할수록 스페니시 악센트가 드러나던 담당자의 말은 정말이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당황한 우리는 한 껏 쪼그라든 체 우리가 갇힌(?)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모든 글자판을 뒤졌다. 결국 호텔 밖으로 나가 초인종 위에 조그맣게 적힌 철자를 찾을 수 있었다. 메모하면서도 이게 맞는지 확신이 안 섰고 몇 번이나 읽어 내려간 끝에 간신히 풀려(?) 날 수 있었다. 글로벌 방탈출 게임 3판에 스무고개 두 번 정도는 거친 기분이었다. 버튼 하나 누르면 1초 만에 해결될 현장 문제였다.
아까는 꼭 유리병에 갇혀 있는 기분이더라. 당황한 데다 내부에 있으니 대체 어디서 쓰여있을지 가늠이 안 되는 거야. 호텔 실내에는 지점명이 안 쓰여있고 게다가 외국인은 식별하기 어렵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어.
중계인은 안알랴줌
숙소가 위치한 곳은 고딕지구에 위치한 레이알광장. 건축가 가우디가 공공 디자인으로 첫 선을 보인 두 개의 가로등과 분수를 중심으로 360도 둘러진 테라스 풍경이 참 멋지다. 추로스를 곁들인 차나 타파스와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광장의 낯. 그리고 매일 밤 플라멩코 공연이 열리는 공연장 주변으로 스페인의 열정을 찾아 온 여행객들을 위해 새벽까지 운영되는 바(bar)가 많다. 문제는 우리 숙소가 이곳에 위치했다는 점. 취객이 수시로 노상방뇨를 하고 길 모퉁이 어귀에 소매치기가 상주하는 스릴 넘치는 호텔의 배경지를 체크인 다음날 저녁에서야 알았다.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여성이 혼자 짐을 풀거나 어린아이가 있는 경우 레이알 광장에서 묵는 것은 피하는 게 좋겠다. 호텔 플랫폼에서 숙박 업체를 고를 때 할인율이나 가격, 주변 볼거리와 실내 이미지, 제공사항 등만 비교할 것이 아니라 호텔이 위치한 주변 분위기나 치안 환경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맘에 드는 호텔을 찾았다면 홈페이지에서도 예약을 할 수 있는지 체크하고 가격과 프로모션 상품이 있는지 한 번 더 체크하자. 이 당연한 선택지가 플랫폼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욕심 많은 집주인도 알려주지 않는다. 오직 경험해 본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시스템의 맹점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타향 만 리에 원격 플랫폼 구축에 성공한다 해도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수까지 자동화할 수 없다. 시스템은 운영 최적화를 위한 설계된 것이지 이용자의 환경이나 특징까지 일일이 배려하기 어렵고 똑똑한 AI도 문제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 낯선 환경으로 떠나온 여행객이 처한 문제 상황에서 현장 담당자의 부재나 문화적 차이, 언어의 장벽으로 어려움에 처한 고객은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클라이맥스는 호텔 측에서 늦어진 체크아웃 시간이 야무지게 계산된 인보이스를 보내왔다는 것. 하루 기분을 통째로 망치고 싶지 않은 관광객의 심리를 예측(?)한 듯 촘촘하게 정리된 약관이 깨알같이 적혀있었다.
이 스마트한 호텔에서 제공한 싸늘한 고객 응대는 이번 여정의 목적을 일깨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한 달 살기 여행자를 위한 기록을 남길 동력이 되었고 우리 일과 삶에 자동화를 어디까지 도입할지 경계도 되었다. 누구나 자동화로 돈나무를 심고 AI로 콘텐츠를 생산하며 쳇GPT에 문제를 입력하는 세상. 창업가의 시작점에는 분명히 존재하나 기업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여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4년 만의 출국이다. 낯선 환경으로 떠난다는 긴장감으로 가격 비교나 랜드마크, 숙소 위치만 체크했을 뿐 주변 환경을 잘 아는 전문가나 현장 담당자가 있는 숙소, 이미 경험해 본 사람들의 조언이 여행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이 경험을 통해 다음 숙박지를 고르는 규칙과 우선순위가 생겼고 남편과 나는 남은 여정을 위해 더 이상의 컴플레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됐고 남은 시간 동안 아름답고 빛나는 추억을 가득 쌓아오는 것으로 하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고객을 생각해본다. 좋다는 리뷰만을 빼곡이 채우거나 반대로 컴플레인이 없다고 서비스를 한 방향으로 판단하거나 착각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맞춤형 서비스가 수반되는 프리미엄 시장을 겨냥한다면 단 한 사람의 고객경험을 촘촘하게 설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하다. 이는 고객이 모인 곳으로 뛰어들어가 여러 각도로 눈높이를 맞춰보지 않고서는 접수하기 어렵다. 특히 거리가 멀고 다른 문화권의 해외 시장진출을 목표할 경우 철저한 현지화 전략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현지인을 파트너급으로 대우하거나 전문가용 서비스 매뉴얼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
"관광객의 시간은 우리와 다릅니다. 돌아갈 날과 예산이 정해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세요. 전 과정에서 느낀 고객 경험의 합이 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기억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임해 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5년 전 미래 먹거리로 기획한 서비스가 서울 대표 체험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고 외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교육을 받았다. 수익의 100%를 브랜드 기획과 광고 콘텐츠 제작으로 벌어들이던 당시 나는 이러한 고객 전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모르는지 알지 못하면 문제를 풀 수 없다. 비즈니스의 본질은 내가 풀고자 하는 문제점을 분명히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 풀어야 할 문제가 보인다면 일도 인생도 2막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다는 신호다.
인생에서 누구나 한 두 번쯤 삶의 속도나 방향을 전환해야 할 때가 온다. 바로 이럴 때, 한 달 살기를 추천하지만 낯선 환경에 대한 긴장과 시차, 무리한 일정으로 오는 피로감 때문에 의외로 잦은 다툼을 하게 된다. 예상 문제는 모조리 비켜가고 복잡한 시스템, 문화적 배경, 언어 장벽등으로 인한 변수가 하루에도 몇 번씩 툭툭 튀어나온다. 마음을 열고 머리를 맞대기보다는 방법을 제안한 상대를 탓하는 것으로 상당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도 많은 시간과 경험을 낭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년에도 한 달 살기를 떠나나기로 했다. 우리들의 시행착오가 누군가의 오답노트가 되기를 바라며 기록을 이어본다. 소중했던 순간들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