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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paca Prime Oct 15. 2020

가치의 희석과  인슐린 저항성의 상관관계

신발 한 켤레의 레슨

까까머리 중학교 입학에, 부모님이 그때 돈으로 십만 원이 넘는 농구화를 사주셨다. 지금도 신발 한 켤레에 십만 원이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큰 맘먹고 사주셨고 난 그 신발이 너무 좋아서, 혹 흙이라도 묻을까, 친구들이 밟을까 조심스레 신고 다녔었다. 참으로 빨리도 키와 발이 자랐지만 한 늘 한 켤레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그때 마나 부모님은 늘 반짝이는 새 신발을 사주셨다. 작은 신발을 벗고 큰 신발로 넘어갈 때에 그 포근하고 세련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고등학교 졸업까지 신었던 신발들을 줄줄 외우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 불혹의 나이에나 드는 생각이지만, 터무니없이 비쌌던 나의 신발 때문에 더욱 많이 부모님의 등골을 빼먹었다는 죄책감에 마음 한구석이 아린다.




그토록 신발을 좋아했던 사내는 나이가 들고 어느 날 컴퓨터를 사랑하게 되었다. 조립, 설치, 수리, 구동, 게임 어느 하나 빼지 않고 컴퓨터를 전 인격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심지어 너무나 좋아해서 아내에게도 한대 만들어 주고, 거실에 있는 TV 에도 당당히 하나 달아줬다. 넌 이제 나의 더욱 ‘스마트’한 TV. 회사에서 받은 노트북 컴퓨터도 가끔 쓰고 몇 년을 사용한 씽크패드도 붙은 정 때문에 못 버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사이좋게 태블릿 피씨도 한 대씩 장만했다. 심지어 아직 초등학생이지만 코로나의 여파로 인터넷 수업을 받는 우리 아이들도 컴퓨터가 한 대씩 다 있다.


이렇게 컴퓨터가 많은데 며칠 전 30만 원가량의 크롬북을 한대 더 샀다. 큰 아이가 쓰던 내 오랜 노트북이 비록 잘 돌아가지만, 확실히 무겁고, 뜨겁고, 벽에 달린 돼지코 없이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부모가 첫째의 컴퓨터 사용을 감독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용이한 크롬북을 사준 것이다. 둘째와 셋째는 이미 크롬북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첫째는 유독 내 오래된 노트북을 고집했는데, 그건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 때문이지 절대 그 무거운 덩어리 때문은 아녔을 거라 확신한다.




컴퓨터가 택배로 도착한 날 일이 터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서 '짜잔' 뜯어서 이 녀석에게 컴퓨터를 건넸다.


“큰 아들 꺼다.”


그런데, 그 친구의 반응이 전혀 내가 상상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반짝하는 새것을 받는다는 설렘은 그 물건의 필요나 가치를 따지기 전에 느끼는 생리적인 현상이 아녔던가? 하지만 이 친구의 반응은 너무나 시큰둥했다. 그 밥에 그 나물이란듯한 표정이란. 동생들은 형의 새 컴퓨터가 샘이 나는지, 자기들 것 보다 더 작다느니 더 반짝거린다느니 만져보고 설레발을 치는데, 막상 컴퓨터를 받은 이 친구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게 상당히 괘씸했다. 요즘 유난히 자주 찾는 'Latte is a horse'를 외치며 일장 일설을 늘어놓으려다가 한숨 거른 뒤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너 인마 뭐라고 해야 될까?”

“감사합니다.”


겨우 겨우 못 이겨 꾸벅하는 것이다. 옆구리 아프겠다 이놈아.




21세기의 아이들, 특히 미국에 사는 아이들 에게 컴퓨터는 더 이상 신기한 물건이 아니다. 태블릿과 스마트폰이 판치는 세상에서 컴퓨터는 아직 다 씻겨 나가지 못한 구시대의 잔류일 뿐이다. 허탈한 맘에 '새것을 사주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 찜찜하고 뭔지 모를 착잡함에 쓰레기나 내어 놓으려고 차고 문을 열고 나갔다. 차고 한쪽 벽에 몇 켤레 인지 셀 수도 없는 신발들이 즐비했다. 이미 수십수백 번은 봤을 신발 진열대가 그날은 유독 눈에 거슬렸다. 성질 더러운 남편은 아무 죄도 없는 아내를 불러본다.


“무슨 신발이 이렇게 많아?”

“다 애들 거예요.”


족히 40켤레는 되는 신발들이? 우리 아이들이 지네라도 되는 것일까? 고작 네 명의 아이들이 몇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말일까? 네 명의 아이들 중 신발이 작아서 '필요'한 아이는 없었다. 모두들 '필요' 이상의 신발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똑같은데 색이 다른 것도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주에 신발 쇼핑을 다녀왔다. 큰 딸아이가 운동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필요'한 운동화마저도 맘에 드는 게 없어서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필요'한데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게 나 홀로 거슬린다면 거짓일 것이다.




이 사태는, 풍요로운 세대에 태어나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 물질적 풍요로움이 물건의 가치와 소중함을 잃게 하는 병으로 변하는 것이다. 과다한 당의 섭취로 인해 체내에 분비되는 인슐린의 저항성이 오르듯, 물질이 너무 많아 그 소중함에 둔해진 우리 아이들은 악질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의식과 사고가 결여된 정신적 성장의 영양 결핍 그 자체였다. 그러나 가장 곤욕스러운 사실은 그 가치를 희석시킨 장본인은 바로 나라는 웃지 못할 사실이다. '물건 귀한 줄 모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내가 이 아이들을 정말 귀한 게 없는 아이들로 키워 놓은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소중한 게 없는 아이들과 소중함을 모르게 한 어른 중 누가 더 나쁜가? 당연히 이 썩어빠진 어른이다.


'에베레스트 산은 어떻게 오르나요?'라는 질문에 '한 걸음씩 이요'라고 누가 했던가? 가르칠 것은 너무 많지만 한 번에 하나씩만 이라도 소중함을 알게 해아 한다. 그래서 처음 조절할 식단은 신발이다. 이제는 작아지거나 구멍이 나거나 헤어지지 않으면 신발을 사주지 않기로 작정했다. 참으로 배부르고 등 따듯한 사람들의 각오다. 하지만 이따위의 각오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진짜 귀한 것을 모르는 불쌍한 아이들이 될 것이다. 과거 나의 부모님이 사주셨던 한 켤레의 농구화는 내게 십만 원의 가치보다 더 큰 것을, 스무 해를 훌쩍 넘긴 지금 가르쳐 주었다. 나도 아이들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켤레의 신발만큼의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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